학문은 대체로 가치중립적이다. 반면 이데올로기는 '그러하다'보다는 '그래야 한다'에 중점을 둔다.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흔히 '그들의 논리'라 칭하기도 한다.
한편 학문의 범주에 포함되는 이데올로기도 있는데 이는 학문의 형식을 갖지만 실질은 학문의 탈을 쓴 유사 학문인 경우도 있다.
어떤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 (자기가 취한 이데올로기에 대한)공부를 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쟁의 관점에서 옳지 못한 태도다. 그것이 공부할만한 가치가 있는 학문이라면 수긍할 수도 있지만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그럴만한 가치가 크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사실보다는 주장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식하거나 멍청하다고 여겨 계몽의 대상으로 삼을 이유는 없다. 그런 내용은 알면 교양 차원에서는 좋을 수도 있으나 모른다고 나쁠 것도 없다.
주장과 사실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주장은 그것을 듣는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으나 사실은 인정 여부와 상관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 따라서 어떠한 주장에 대한 무지는 그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이익이나 손해가 없으나 사실에 대한 무지는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 미생물에 대한 지식이 없던 시대에는 소독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4체액설에 근거한 사이비 의학에 의지하거나 기도와 굿을 하는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감염과 패혈증으로 사망했었다.
논쟁에 앞선 공부를 요구할만한 예를 든다면, 화재를 예방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경우 상대가 과학적 지식이 전혀 없다면 발화의 3가지 요인에 대해 우선 공부해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과학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나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지식이다. 경제적 선택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경우 상대가 비용과 공급곡선의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그것에 대해 공부를 하라고 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공급과 비용의 관계는 항상 그럴 수 밖에 없는 과학적이고 필연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발화의 3요인이나 비용, 공급곡선과의 관계같은 객관적 사전 지식은 논의하는 당사자 모두가 공통으로 동의하는 논의의 전제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숙지를 통해 논쟁을 보다 발전적 방향으로 심화시킬 수 있다.
한편 자신이 선호하는 이데올로기를 주장하기 위해 상대에게 공부를 권하는 것은 주장하려는 바를 논의의 전제로 삼으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어서 순환 논리일 뿐이다.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사람이 민주주의자에게 앙리4세의 신하인 베로아의 왕권론과 루이14세의 스승인 보쉬에가 저술한 성서 정치학도 읽어보지 않은 무식한 당신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주장을 한다면 상대를 설득할 수 있을까.
상대를 설득하고 싶다면 그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주장을 보편적이고 중립적 관점에서 시작하여 상대를 설득하면 된다. 왕권신수설 신봉자가 엄청난 역사 및 신학적 지식과 달변으로 그럴싸하게 논리를 전개해간다면 왕권신수설에 설득될 민주주의자가 생길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다.
자기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공부하라는 것은 순환 논리라는 문제점 이외에도 자신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는 태도이기 때문에 옳지 않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기는 원래 어려운 일이다. 설득의 수고는 듣는 이가 아닌 주장하는 사람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