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물권법을 공부했을 때 봤던 판례가 기억난다.
민법 259조 1항의 내용은 이렇다.
타인의 동산에 가공한 때에는 그 물건의 소유권은 원재료의 소유자에게 속한다. 그러나 가공으로 인한 가액의 증가가 원재료의 가액보다 현저히 다액인 때에는 가공자의 소유로 한다.
오래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판례에서는 소도둑이 소를 훔쳐 도축한 후 우피(소가죽)를 분리한 것은 가공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도축으로 인해 가치가 현저히 증가하지는 않았을 테고 도축 자체가 물건의 성질을 크게 바꾸는 것도 아니라 당연한 말 같아 보이긴 한데, 죽여서 가죽을 벗겨 놓은 소가 살아있는 소보다 가치가 높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사실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소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는 요즘에, 사람이 소를 키우는 이유는 잡아먹기 위해서다. 소는 살아있을 때 보다 죽어서 부위별로 해체되어 있을 때 가치가 있다. 도축된 소의 회계적 장부가치는 살아있는 소의 가격에 도축비를 더한 것이다.
죽은 애완견은 가치가 없다. 살아있는 애완견은 가치가 있다. 잡아먹으려고 키우는 개는 소와 마찬가지로 도축을 했을 때 더 가치가 있다. 죽었을 때가 더 가치 있지만 성장이 끝난 개를 사료까지 먹이면서 살려 두는 이유는 수요가 없을 때 미리 잡아서 냉동 보관을 하면 육질이 나빠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보관 비용이 사료값보다 많이 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장기를 기증할 수 있다. 뉴스를 보면 한 사람의 죽으면서 장기를 기증해서 여러 사람이 새 생명을 얻었다는 미담이 가끔 나온다. 죽으면서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으니 어떤 사람은 살아 있을 때보다 죽었을 때 더 가치가 클 수도 있을까? 그렇다면 그 사람의 생명의 가치는 마이너스인가?
죽으면 가치가 오른다니 소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을 것이다. 소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그 가치는 누가 평가하는지에 대해 따져볼 수 있다. 소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체는 소 자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소가 일을 하던 시대에 소의 노동력에 대해 인간은 매우 큰 가치를 부여했다. 소를 잡아먹는 것을 국가가 중죄로 규정하여 금지할 정도였다. 그래서 소가 늙어서 일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맛없고 질긴 늙은 소를 잡아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의 노동력은 전혀 가치가 없다. 성장기가 지난 소를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은 사료값과 축사 공간에 대한 기회비용을 낭비하고 재고 회전율을 떨어뜨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성장기를 거친 사춘기 후반쯤에 있는 소는 도축을 해야 타산이 맞고, 적정한 시기에 도축된 소는 필요 이상으로 오래 살아있는 소보다 가치가 크다.
소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주장할 것 같다. 내 가치는 내가 평가하겠다. 나는 힘이 세지만 온순하고 정이 많다. 눈이 크고 속눈썹이 길고 예쁘다. 덩치가 커서 풀을 많이 먹지만 번식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서 토끼나 쥐처럼 다른 동물에게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 말처럼 잘 달리지는 못하지만 말보다 부지런하고 말보다 꾸준히 잘 걸어 다닐 수 있다.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다. 두 번째 되새김질을 할 때 느끼는 부드러워진 건초의 식감과 향기를 아느냐. 두 달 배기 송아지의 부드러운 이마를 혀로 핥아줄 때 느끼는 기분 좋은 혀의 촉감을 아느냐. 내가 죽으면 이런 나의 가치는 없어진다. 네 마음대로 나에 대해 판단하고 죽이지 말라.
노련한 축산업자가 소와 논쟁을 벌여, 생명은 소중하고 소의 눈은 예쁘고 건초가 맛있겠지만 그래도 소는 죽었을 때의 가치가 더 크다고 납득시키고 결국 양자 동의 하에 도축장으로 향하는 공상에 빠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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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련한 축산업자의 변
너는 고기소로 태어나서 키워졌어. 네 귀에 붙어있는 태그를 보니까 32개월쯤 살았구나.
지금 너를 여기서 풀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네가 너무 불쌍하니까 주인에게 네 값을 치러주고 내가 널 풀어주면 어떨까?
그런데 나는 너를 기를 여건이 안되고 기를 의사도 없어. 이제부터 네 끼니는 네가 해결해야 해. 일단 너는 마장동을 네 발로 벗어나야 해. 그리고 서울을 빠져나가야겠지.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다시 잡혀올게 될 거야. 너는 사람들 이목을 끌기에 충분히 덩치가 크고, 사람들 눈에 너는 버릴 데 하나 없는 돈덩어리니까.
어떻게 서울을 벗어났다 하더라도 그 이후도 만만치는 않을 거야. 들에는 밭작물들이 넘치지만 그걸 먹으면 너는 유해동물 취급을 받아서 농부들의 손에 퇴치당하게 될 거야. 총을 맞으면 몇 시간 동안 괴로워하다가 죽게 되겠지. 몽둥이로 맞아 죽거나 개에 물려 죽는 것보다는 덜 괴롭겠지만...
산에서 사는 건 어떨까. 그런데 왜 서울 인근 산에는 염소나 노루가 없을까? 너의 몸은 야생에서 살기에 지나치게 비대해. 근육은 힘을 쓰기보다는 맛있는데 중점이 되어 있어 마블링이 풍부하게 들어있지. 게다가 내가 알기로 너는 생존 조건이 제법 까다로운 종이야. 염소나 노루도 못 사는 산에서 네가 살 수 있을까? 먹고는 살더라도 혹시 사냥당하진 않을까?
산에서 풀 뜯고 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너는 혼자야. 죽을 때까지 혼자일 거야. 다행히 거세는 했구나. 발정기가 와도 덜 괴롭긴 하겠네. 네 눈이 예쁘고 네가 잘 걷는 게 너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네 주인에게 돌아가서 여기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면 좋을까? 출생 후 32개월간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엄마와 헤어졌어. 엄마 젖보다는 젖병을 빨면서 컸지. 그러다가 좁은 축사에 갇혀 살았어. 자꾸 움직이면 사료값도 많이 들고 육질이 질겨지기 때문이야. 육질을 위해서 가끔 음악을 틀어주는 주인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되새김질하며 조악한 음질의 클래식 음악을 들은 거 그게 네 삶의 가장 즐거운 기억이라고 봐도 될까? 가끔 예방접종 같은 이벤트는 있었겠지만 대체로 의미 없고 따분하고 괴로운 나날들이었을 거라고 짐작해. 그렇지 않니? 숨 막혀 죽을 듯했던 지난 여름을 기억해봐. 내 기억으로 작년 여름은 축사는 40도를 훌쩍 넘었는 날들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이 이어졌었어. 오래 살아서 뭐할래?
내가 봤을 때 너는 그곳에서 태어난 이상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야. 오늘은 네가 겪은 그간의 고초를 끝내는 날이야. 다행히 나는 기술이 꽤 좋은 편이야. 백이면 백 한방에 보낼 수 있지. 다른 이가 보기엔 끔찍해 보일 순 있겠지만, 정작 너 스스로는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할 거야. 돼지 멱따는 소리라는 말은 나에겐 너무 생소한 말이야. 어찌 보면 나는 너의 구원자라고 할 수 있어. 눈 깜빡하는 것 같이 끝나. 1초도 걸리지 않아. 그래도 무섭다면 가스나 전기를 쓰는 방법도 있긴 한데 순수하게 선의로 나는 내 방식을 추천하겠어.
너는 밖으로 풀려나고 싶니? 아니면 살던 곳으로 돌아나 가고 싶니? 아니면 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그만 쉬고 싶니? 네 불행이 끝나면서 네 주인은 너를 키울 때 든 비용을 회수할 수 있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너의 뿔과, 가죽과 근육과 내장을 이용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스스로를 희생해서 사람들에게 일종의 보시를 베푸는 셈이지. 사후 세계를 믿는다면 공덕을 쌓고 떠나는 셈이야. 혹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할까 결정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