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와 역사

낙서 2015. 2. 12. 00:53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사례를 간접경험으로 삼아 현재의 결정에 도움을 얻기 위함이다. 따라서 역사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국사 교육의 목적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와 유사하지만 몇가지 차이가 있다.

국사 교육은 국민에게 국가 정체성을 심어주고 국민으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해서 국론을 통합하고 애국심을 내재화 시키는 기능이 있다. 이런 정책적인 기능 때문에 자국의 역사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배우기는 어렵다. 조상이 못난 짓을 했더라도 될 수 있는 한 그것을 숨기거나 축소한다. 못난 짓을 완전히 비판하고 거기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찾으려기보다는 못난 짓의 순기능을 찾으려는 시도를 병행하거나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그런 이유로 역사 교과서를 왜곡했을 것이다.


공교육에 의해 생긴 편애적 애국심과 상반되는 관점을 공공연히 제기하면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일제 때 민족 말살 정책을 겪으면서 당시 역사학계는 식민사관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현재는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과도한 민족주의적 사관이 자리잡은 탓에 우리 역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표현하기가 어려워지는 듯 하다. 조상이 잘못한 점을 꼬집으면 그 의견의 옳고 그름을 합리적으로 토론하기 전에 친일사관이라는 비난을 먼저 받기도 한다.


19세기 중국은 영국보다 쓸만한 물건을 잘 만들어서 영국의 교역품을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 영국은 중국 상품을 많이 수입하서 대중 적자가 누적되었다. 영국은 중국에게 상품 경쟁력이 밀리자 아편을 팔았다. 중국인들의 마약 중독이 사회 문제가 되자 중국 조정은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 영국 상인이 가진 아편을 강제로 차(茶)로 값을 치르고나서 불태워버렸다. 아편을 계속 팔 수 없게 되자 영국은 신무기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켜서 중국의 항복과 전쟁 배상금을 받고 아편을 계속 팔았다. 아편 전쟁을 통해서는 상품 경쟁력이 없으면 무력까지 동원해서 마약이라도 팔아먹는 제국주의의 추악한 일면을 볼 수 있다.


그로부터 몇십년 후 있었던 구한말 일제의 쌀 '수탈'을 상기하며 경제학의 자유무역 이론과 괴리되어 혼란을 느끼다가 든 생각이다.

1920년대 일제가 우리나라에서 산미 증식계획을 시행했을때는 국내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 정도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이 때는 식민지 시대였기 때문에 일본은 쌀에 대해 제 값을 치르지 않았다. 쌀의 유출이 많아지면 국내의 쌀 값은 오르는데 일본은 오르기 전의 가격으로 쌀을 샀다. 이런 경우는 쌀을 수탈 당했다고 보는게 맞다.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는 사정이 다르다. 일본에 개항을 했던 19세기 말 당시 우리나라 보통 사람들은 옷이 한벌뿐이라서 아껴 입느라 옷을 잘 안입고 다닌다는 설명이 붙은 외국 선교사가 남긴 사진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옷감을 수입했고 그 대가로 쌀을 수탈당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수입한 광목은 값이 싸고 질이 좋았다고 한다. 옷감을 전보다 싸게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옷을 아끼느라 벗고 다니는 모습도 덜 보게 되었을 것 같다. 조상들은 가난했다. 쌀도 모자라고 옷감도 모자랐다. 그와중에 그들은 쌀을 다소 포기하는 대신에 옷을 선택했다. 쌀도 넉넉하지는 않았겠지만 옷감은 쌀보다 더 모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굶어 죽을 정도로 쌀이 모자랐다면 공급 부족으로 인해 옷감에 대한 쌀의 상대 가격은 높았을 것이다. 그러면 쌀을 팔아서 옷감을 사는게 손해이기 때문에 교역이 일어날 수 없다. 자유 무역 비교우위 이론에 따라 양국 국민의 후생은 증가한걸까 아니면 우리 민족은 힘이 없어서 쌀을 수탈당한걸까.


만약 수탈 당한게 맞다면 무력을 가진 국가가 외견상 자유무역을 하면서 수탈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를 따져봐야 하는데 교과 과정이나 교양 수준의 역사서에서는 그런 접근을 본 적은 없다. 또한 일본 상인이 우리나라에 수출한 옷감은 영국에서 무관세로 수입한 물건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왜 중국이나 일본처럼 영국 상인과 직접 교역하지 않고 일본 상인에게 유통 마진을 바쳐야 했을까?


여러 의문은 생기지만 이쯤에서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런 의문을 단서로 달기보다는 그냥 쌀을 수탈 당했다고 말하는게 신상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편 전쟁과 쌀수탈은 그 원리가 다름에도 애국적, 민족주의적 접근에 매몰되어 제국주의의 탐욕이 문제라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합리적인 시각에서 과거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역사 공부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게 된다.

과도한 애국 사관은 사실을 왜곡하여 정책적 목적에 부합되는 지식만 강조하고, 주변국에 대한 필요 이상의 적대감, 부질없는 자부심을 키우는 부작용이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 역사만을 깊게 공부하는 것 보다는 중국사나 고대 로마, 십자군 시대, 아랍 역사, 미국 건국사,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사 등 외국 사례에서 역사의 교훈을 찾는게 나을듯 하다. 남의 역사는 객관적 시각으로 자기 검열 없이 접근하기 쉽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사에 비해 사례 자체가 풍부하고 세계사적 변혁이 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반복되는 역사의 법칙성과 지혜를 찾기도 훨씬 쉬울 듯 하다.


예를 들어, 현재 선진국 및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다문화 정책에 대해서 나아갈 올바른 방향은 국사보다는 외국 역사에서 답을 찾기가 쉽다. 로마는 갈리아인, 그리스인, 소아시아인, 이집트인 등 이민족들을 성공적으로 포용했다. 반면 게르만족의 대이동에 대해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나라가 망했다. 국가를 부강하게 할 올바른 다문화 정책이 무엇인가를 따져볼 때 참고할만한 역사적 기록은 로마사에는 풍부하게 남아있다. 반면 발해에서 말갈족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후예들이 어떻게 권력을 잡았고, 어떻게 동화정책을 시도했으며, 결국 어떻게 몰락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그에 대한 역사의 교훈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조선의 개화운동이 실패한 이유보다는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비교, 대조하고 일본보다 유리한 조건이었던 중국이 오히려 개화에 실패한 이유에서 역사의 교훈을 찾는게 오히려 적절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 공부의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국사에만 너무 깊이 파고 들기 보다는 세계사를 얕고 넓게 알면서 필요한 부분을 골라 심도있게 알아가보는게 낫다고 본다. 세계사는 애국심에 얽매이지 않은 냉정한 접근이 가능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데 적합한 사례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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