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공주들

낙서 2014. 6. 6. 18:38

디즈니 공주들은 가부장적 세계관의 수동적 여성상을 보여준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건지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었다. 영화 말레피센트가 개봉했을 때 원작의 마녀가 어떤 캐릭터인지가 궁금해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구해서 봤다. 주인공 오로라 공주는 인어공주의 아리엘이나 알라딘의 쟈스민같은 기존에 알고 있었던 디즈니 공주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보였다. 내친 김에 공주들이 등장하는 아직 못봤던 다른 작품들도 몇가지 감상해봤다. 그랬더니 디즈니에 대한 그런 비판이 왜 생겼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그 비판의 한계 역시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1937년 백설공주는 백치미가 물씬 느껴지는 14살 소녀다. 자연스럽게 통통한 모습이 복스럽고 귀여워 보이긴 하지만, 이후 작품들과 비교하면 어색해 보이는 초기 그림체다. 더빙된 목소리는 정말 14세 소녀를 캐스팅 한 것 같다. 공주는 천진난만하고 착해빠졌고 약간은 수동적이지만 여자라서 그렇다기보다는 어려서 그런 것 같아 보였다. 한편, 왕자도 그리 똑똑하거나 용감해 보이진 않는다. 왕자와 공주 마주치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첫눈에 서로 반한다. 디즈니의 멍청한 여성상이 시작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시작되었다.

1950년 신데렐라는 착하고 씩씩하긴 한데 암울한 현실의 탈출구가 우연히 왕자를 만나는 것 밖에 없었던 가련한 여자다. 그런데 그 우연이 일어나고 말았다. '신데렐라'라는 이름값을 하는 전형적인 신데렐라형 케릭터다. 거의 등장하지 않아서 단역같아 보인 왕자보다는 빨리 손자를 보고픈 왕의 코믹 연기가 돋보였다. 코믹한 왕의 이미지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재활용된다. 작품이 나왔을 때는 우리나라에서 6.25가 일어났던 해였다.

1959년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주인공 오로라 공주는 디즈니 공주 중에서 가장 수동적인 캐릭터인데, 마녀의 저주를 피하느라 요정 아줌마 3인방의 보살핌을 받으며 숲속에서 숨어 자란 예쁜 백치 아가씨다. 숲속에서 노래하고, 동물들과 놀고, 우연히 만난 왕자와 춤추다가 사랑에 빠지고, 마녀에게 최면 마법을 당해서 물레 바늘에 손을 찔려 잠을 자다가 왕자의 키스를 받아 깨어나서 결혼했을 뿐이다. 예쁘긴 한데 출연 분량이 너무 적어서 조연 같아 보였다. 사실상 주연이었던 요정 아줌마들은 자기들은 사람들을 돕는 마법은 쓸 수 있으나 다른이를 공격하는 마법을 쓸 수 없다면서 마녀(말레피센트)와 마주하기를 두려워 했다. 그 요정들은 왕자가 마녀를 물리칠 수 있도록 칼과 방패를 만들어줬다. 왕자는 이전 작품들에 나온 왕자들과 비교했을 땐 그나마 용감했고 나름 분전했으나 용으로 변신한 마녀를 물리칠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약하고 착한 척 하던 요정 아줌마들은 왕자에게 만들어 줬던 칼을 염력으로 날려서 용으로 변신한 말레피센트의 배에 꽂았다. 마녀는 요정 아줌마에게 칼침을 맞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왕자가 한 일은 칼을 마녀 앞까지 날라다 준 것 뿐, 사실상 요정이 칼을 만들고 던져서 마녀를 물리친 이야기로 보는 게 맞을 듯 하다. 이 작품이 나왔을 때 우리나라는 자유당 정권 말기였다. 1년 후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발표되었고, 영화에서 주인집 사모님은 흰 한복 차림에 쪽진 머리를 했는데, 가사도우미 불륜녀(하녀)에게 노골적으로 농락당하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디즈니 공주 3명은 예쁜 인형같은 수동적인 여성상을 보여줬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1989년 세상은 많이 변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냉전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87년 6.10 민주화 항쟁 및 6.29선언 이후 대통령 직선제 선거를 치른 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디즈니는 인어공주 아리엘을 데뷔시킨다. 아리엘은 디즈니 최초의 눈깔 괴물(눈크기가 얼굴 길이의 육분의 일 이상을 차지하는) 공주이기도 했다.

아리엘은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이긴 하지만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아가씨다. 현실에 만족하는 다른 언니들과 달리 밝은 빛을 따라 육지에 가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왕자에게 반해서 그를 선택했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육지로 올라오는 모험을 감수했고, 적극적으로 왕자를 유혹했다. 최면 마법에 걸려서 마녀와 결혼할 뻔 한 왕자를 제 정신 찾게 하고 마녀에 맞서 싸워 사랑을 쟁취했다. 이전 공주들에 비하면 제법 일취월장한 모습이다.


1991년 미녀와 야수의 벨은 현명하고 지적인 호기심이 많고 책임감과 자립심 강한 아가씨이다. 마을에서 가장 인기있지만 무례한 마초 신랑감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할 줄 아는 당찬 성격이다. 아리엘 공주처럼 사랑에 눈 먼 바보는 아니지만 히키코모리같은 야수에게 연민을 느끼고 보듬어서 비뚤어진 야수의 마음을 점차 순화시킨다. 그리고 자신이 변화시킨 야수에게 서서히 사랑을 느낀다. 결국 그가 왕자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구원하고, 왕자와 결혼하여 공주가 된다. 멍청한 남자를 사람 구실 하게 만드는 평강공주 같은 케릭터다. 바람직한 여성상은 이미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1992년 알라딘의 쟈스민 공주는 최초의 유색인종 공주인데, 호랑이를 고양이처럼 다룬다. 예쁘장한 외모와 대조적으로 운동 능력이 탁월해서 왠만한 남자는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여장부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원치 않는 무례한 왕자들의 청혼을 무력으로 내치고 가출까지 한다. 결국 인습을 깨고, 평민이지만 자기가 사랑하는 알라딘을 남편감으로 선택한다. 이젠 드센 디즈니 공주까지 등장했다.

1994년 라이온킹의 날라는 하쿠나마타타를 노래해며 안빈낙도에 빠진 심바를 일깨워 왕이 되게 한다. 평강공주같은 케릭터다.(라이온킹 심바와 결혼했으니 여왕이나 왕비로 볼 수도 있으나 나이가 어려서 일종의 공주로 보기로 함)

1995년 포카혼타스는 아버지가 미리 정해 놓은 약혼자를 거부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찾고 그에게 자연과 공존하는 삶에 대한 영감을 주고, 나중엔 그를 죽음의 위험에서 구해주기까지 한다. 사랑밖에 모르는 바보는 아니라서 남자를 결국 떠나 보낸다.(추장 딸이지만, 디즈니에서 공주로 분류함)

1998년 뮬란은 늙고 약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입대했고, 정확히 기억이 안나지만, 흉노를 물리친 영웅이 되었다.(공주는 아닌 것 같지만 디즈니에서 공주로 분류함)

1999년 타잔에서 제인은 40년만에 디즈니의 수동적이고 맹한 여성상을 보여주긴 했으나 공주는 아니었고, 야생 정글이라는 배경에서 여성은 신체 특성상 체력적 한계가 있음을 감안할 수는 있다.

2009년 공주와 개구리의 티아나는 근면 성실하고 인생의 목적이 뚜렷하고 자주적인 아가씨이다. 자신이 개과천선 시킨 왕자와 결혼해서 공주가 된다. 평강공주형 캐릭터다. 똑똑하고 자주적이고 근면성실하고 별로 예쁘지도 않은 흑인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을 보면 디즈니 공주 비판에 대한 디즈니사의 노이로제가 느껴진다.

2010년 라푼젤은 등불을 보기(꿈을 이루기) 위해 위험으로만 가득찼다고 알고 있던 세상으로 발을 내딛었다. 유진과 사랑에 빠지긴 하나 그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지 않았고, 때때로 용감한 모습들을 보여줬다. 결국 비열한 성격의 도둑놈이었던 유진을 개과천선 시킨 결과로 이어졌다.

2012년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원제가 Brave다. 메리다 공주는 활쏘기는 좋아하고 시집가기는 싫단다. 특별히 더 할 말이 없다. 외모 자체가 혁신적이다.


2013년 겨울왕국의 안나와 엘사는 어딘가 맹하고 수동적이면서 사랑 밖에 모르는 인형같은 디즈니 공주의 클리셰를 깼다는 평가를 뜬금없이 받았다. 하마트면 안나는 그런 디즈니 공주가 될 뻔 하긴 했지만... 한스 왕자를 처음 만났을때 대화 중 I'm not that princess라는 대사는 복선이었나?


겨울왕국 이전의 디즈니 공주는 12명(암사자 날라 포함, 제인 제외)이었는데, 디즈니는 박정희와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만들었던 작품 3편 때문에 영원히 비판받고 있다. 1959년에서 1989년까지, 30년 공백기 동안 형성된 평론가와 대중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과 작품이 필요한 듯 하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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