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몬스터(2003년 작)라는 영화를 봤다. 불우한 생을 살던 나이 든 창녀가 뜻하지 않게 죽음의 위기에서 정당방위 살인을 저지르고나서, 도주하는데 동성 애인과 사랑의 도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계형 연쇄 살인 강도가 되어 결국 사형 판결을 받게 되는 내용이다. 영화는 상당한 수작이었고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지만 영화 리뷰는 소질이 없어서 생략한다. 어쨌든 만만찮은 찜찜함과 뒷맛이 남았다.

영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화면을 보면서 느꼈던게 있는데, 저런 못생기고 비호감인 여배우를 어디서 캐스팅했을까 라는 궁금함이었다. 검색을 해 보니 샤를리즈 테론이라는 배우였다. 처음 본 사람이 아니라 예전에 봤던 다수 영화에 출연했었던 배우였다. 상당히 매력적인 외모였기 때문에 같은 인물로 인식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못생긴 비호감 창녀 연기를 위해서 체중을 13킬로 늘리고 특수분장을 했다고 한다.

 

헐리우드의 특수분장 능력에 잠시 감탄하다가 곧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영화를 찾아봐도 범죄의 재구성에서는 박신양이 추남으로 분장을 했고 김아중도 뚱녀 분장을 했었다. 구체적인 예가 당장 더 떠오르지는 않지만 잘생긴 배우를 못생겨 보이거나 바보처럼 보이게 하는 예는 많다. 그런 분장을 하려면 몇시간 걸린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한 시각적인 효과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방법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반대로 못생긴 사람을 잘생겨 보이게 하는 분장의 예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런 분장법이 있다면 광범위하게 실용화되었을 것이다. 물론 화장을 해서 더 매력적인 얼굴을 만들 수는 있지만 화장빨로 커버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다.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변화는 비가역적으로 보인다.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는 있다. 배우란 직업은 대체로 매력적인 외모인 사람이 종사하기 때문에 못생긴 역을 위해서 특수분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잘생긴 역은 잘생긴 배우에게 시키면 되니까 잘생겨 보이게 하는 특수 분장을 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다. 언뜻 일리가 있을 듯 하지만 시각을 약간만 달리하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성인 시장을 생각해 보면 된다. 성인물 배우는 외모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예쁜 배우는 많지 않다. 예쁜 배우는 소프트한 영상만 찍어도 충분히 팔린다. 하지만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은 배우는 하드한 영상을 찍어야 겨우 팔릴 수 있다. 줄에 묶이기는 예사이고 심하면 오물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심지어 두들겨 맞거나 바늘에 찔리기까지 한다. 하드한 영상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서 기왕이면 예쁜 배우가 출연하는게 인기가 있을텐데, 분장으로 예뻐질 수 있었다면 하드코어 시장에는 왜 못생긴 여자들이 수두룩할까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또한 호스티스의 외모에 따라 달라지는 유흥업의 계층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분장으로 예뻐질 수 있다면 텐프로는 왜 요금이 비싸고,  어떻게 뻣뻣하게 구는 영업행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따라서 배우라는 직업상 잘생겨 보이게 하는 분장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잘생긴 분장의 예를 찾을 수 없다는 반론은 설득력이 약하다.

 

못생겨지려면 분장 정도로도 충분하지만 잘생겨지려면 부작용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성형을 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쌍꺼풀 수술을 할 때는 매우 정확한 위치에 주름을 만들어야 한다. 성형수술은 지향하는 정답이 있다. 정답인 라인에서 1밀리미터라도 오차가 있으면 인상이 어색해고 추구했던 아름다움과 멀어진다. 정교하지 못한 수술은 안하느니만 못한 재앙이 된다. 반면 추함을 만들기 위해서는 눈꺼풀 위에 아무렇게나 주름을 만들면 된다. 아무렇게나 해도 만분의 일의 확률로 제자리에 주름이 만들어 질 수도 있겠으나 그런 우연을 반론의 근거로 삼는 것은 수능에서 정답을 전부 아무거나 찍어도 만점을 받는 가능성이 완전한 0은 아니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느 정도 예쁜 사람이 성형을 해서 더 예뻐지기는 어렵다. 9점 과녁에 꽃힌 화살을 뽑아서 다시 쐈을 때 더 높은 점수인 10점을 받기 위해서는 국가대표급 정확한 조준과 격발 기술이 필요하다. 화살을 잘못 쏴서 7점이나 8점에 명중할 수도 있다. 성형 전 얼굴이 9점이었다면 재앙이다. 망가뜨리는게 목적이라면 눈 감고 허공에 화살을 쏴서 0점을 만들 수도 있다.

기존 얼굴보다 못생겨지게 하기는 쉽지만 잘생겨지게 하기는 어렵다. 얼굴이 형태가 일정한 규칙에 가까우면 아름다워 보이고 그 규칙에서 멀어지면 추해보인다는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다.

이데아론이 연상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생각하다가 이데아까지 연상이 되었는데, 아름다움은 사회 문화적 상황에 따른 가변적이라고 보는 상대주의 입장과 충돌한다. 아랫 입술을 인위적으로 늘리는 원시 부족이나 여성의 목을 기린처럼 늘리는 태국 고산족은 상대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예가 되곤 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존중한다 하더라도 절대적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 문화적 영향을 받지 않은 개나 고양이도 사람을 대할 때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돌이 지나지 않은 아기들도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람이 봤을 때 예쁘게 생긴 개나 고양이는 개 고양이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같은 듯하다. 인종차별적 의도는 없다만 한걸음 더 나아가면 피부톤이 어두운 원시부족 사람들이 흰 피부를 좋아하고 미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많이 봤지만 더 검은 피부가 되려고 노력하는 원시 부족은 본 적이 없다. 황인인 우리 조상들도 흰 피부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생각했었다.

 

아름다움을 상대주의 입장으로만 보려는 것은 일종의 혼동인 것 같다. 거칠게 말하자면, 평생 발레를 해서 변형된 발을 '가장 아름다운 발'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그 발을 실제로 외형상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중국의 전족 풍습은 송 시대에 생겼다. 전족에는 여성을 천시하는 유교적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었다. 전족한 발 모양은 지금 입장에서 보면 흥측하다. 그러나 유교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형된 시각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인다. 따라서 상대성중 일부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왜곡시킨 착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다시 이데아론으로 돌아온다. 절대적 기준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그 기준인지 설명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아름다움의 실체는 설명하기 매우 어렵지만 몇가지 사항을 참고해 볼수는 있다.

 

첫째 동물이나 영유아의 판단을 참고하는 것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다른 종 동물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부적절할 수는 있지만 사회 문화적 왜곡에서 벗어나 편견 없이 판단할 수 있는 참고사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비가역성이 그 단초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없는 화상 자국을 만들어 내기는 쉽지만(분장을 하거나 실제로 화상을 당하거나) 있는 화상 자국을 없애기는 불가능하다. 흉터는 만들기는 쉽지만 없애기는 어렵다. 젊은 배우를 늙어 보이게 분장하기는 쉽지만 늙은 배우를 젊어 보이게 분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설정상 늙은 배우를 젊어 보이기 위해 기껏 하는 것이 화장 떡칠에 앞머리 내리고 어울리지 않게 젊어 보이는 옷을 입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를 쉽게 줄 수 있는 쪽을 미의 기준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다만 이런 관점에는 몇가지 문제가 있는데, 우선, 크기나 길이처럼 치수화되는 항목은 중간값일 때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미의 기준이 비가역성에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낮은 코는 가짜 코를 붙이거나 성형을 해서 비교적 쉽게 극복할 수 있는데 반해서 높은 코는 낮게 바꾸지 못한다는 반론이 가능해진다. 동양에서는 높은 코를 잘생긴 코로 보고 보형물을 넣는 성형이 흔하지만 아랍이나 서양권에서는 너무 높은 코는 흉하다고 여긴다.

큰 눈은 작게 뜰 수 있지만 작은 눈은 크게 뜰 수 없기 때문에 눈이 클 수록 가역적 변화에 능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눈이 탁구공 만큼 큰 사람은 기괴할 뿐, 매력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예가 몇가지 더 있다. 쌍꺼풀은 비가역성으로 판단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애매한 항목이다. 쌍꺼풀은 만들기는 쉽지만 없애기는 어렵다. 쌍꺼풀은 호불호가 갈리는데 쌍꺼풀을 선호하는 사람이 좀 더 많다. 다만 쌍꺼풀 자체보다는 눈을 크게 하는 효과가 동반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쌍꺼풀 있는 눈은 쌍꺼풀 없는 큰 눈과 비교하는게 맞을 듯 하다.

머리카락의 색과 길이 역시 비가역성 여부로만 아름다움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비가역성 여부 역시 한가지 참고사항일 뿐  아름다움의 판단 기준 그 자체로 삼을 수는 없다.

 

아름다움에 대해 이데아론이 연상되어서 미적 기준이 단 한가지일 뿐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다. 요즘 TV에 나오는 신인 여배우들을 보면 꽤 예쁘긴 한데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마치 레토르 때문에 상향 평준화 되었지만 집집마다 특색은 없어진 요즘 짜장면 같은 느낌이다. 미의 기준이 단 한가지 뿐이라면 성형을 한 얼굴이 모두 비슷 비슷한 모습이라는 현실이 당연시 될 것이다. 똑같은 얼굴을 보고 그들은 단지 정답을 맞췄을 뿐이라고 정당화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모범답안만이 존재할 뿐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미적 기준은 여러가지로 보는게 더 설득력이 있다. 20대 초중반 시절의 알랭들롱과 장동건, 나스타샤 킨스키와 손예진은 서로 닮지 않았고 각각 개성이 있지만 개선할 여지 없고 서로 누가 더 아름다운지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각각 고유하게 아름답다. 미적 기준이 여러가지라는 상대성은 더 이상 개선할 여지가 없는 수준 이상인 사람들을 비교하려 할 때 주장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따라서 미의 상대성을 인정하더라도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절대 다수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 상대적이고 다양한 아름다운 각각의 기준에서 약간 또는 멀리 벗어나 있다.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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