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 희망에 넘쳤고, 그나마 덜 때묻었던 아주 예전에 썼던 글이다. 어렸을 때고, 독설 컨셉이었던 시절이라 거친 표현이 많다. 글 쓰는데 취미 붙인 지가 얼마 안된 때라서 어색한 문장도 많다. 추상적으로 쓴 긴 글이라서 이해가 어려울 수 있다. 머릿속에 주변 인물 중 저 잘난 맛에 사는 어리석은 사람 하나를 떠올리며 읽어보면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썼던 당시에는 그닥 맘에 안들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보니 나쁘기만 한 글은 아닌것 같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오랫동안 더 살다보니 밥 먹기 전에 이 닦는게 당연하다고 끝까지 우기는 사람도 봤고, 사칙연산 순서도 규칙이 아닌 신념으로 밀어붙이는 사람도 봤다.

성경, 불경, 탈무드, 유교 경전 등에서 이상한 사람을 교화시키라고 권하는 내용은 드물지만, 피하거나 처단하라고 권하는 부분은 종종 볼 수 있다.

나에게 계몽 의무가 없음을 깨닫게 된 지금 시점에서는, 어린 시절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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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님 말씀에 모든 사람은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나보다 잘난 사람에게는 그의 잘난 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본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나보다 못난 사람을 본다면 그가 저지르는 잘못을 내가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함으로써 그런자를 통해서 조차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엇비슷한 사람들끼리도 그들끼리만의 장단점이 있으므로 결국 누구에게나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여기까지는 어렸을때부터 들어온 상당히 상투적인 이야기다.

모든 사람으로보터 배울 것이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면, 못난자가 자청하여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가르쳐보겠다고 나설 염려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못난자는 자기가 못났다는걸 모를때가 많기 때문에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못난자가 자신의 못남을 깨닫지 못하고는 자신보다 잘난자의 행동을 본다고 보자. 쇼펜하우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자기 기준에서 보기 때문에 자기보다 잘난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즉, 아는 만큼 보인다. 따라서 자신의 어리석은 기준과는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이유로 실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그자를 보고 '어리석다' 라고 착각하게 될 수가 있는데, 그럴 때 문제가 생긴다.

어리석은 자의 훈계의 대상이 되는 자가 현명한 자라면 못난자가 감히 자신을 가르치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자기는 더 잘난 사람 앞에서 함부로 나대지 않아야 겠다는 또 다른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 현명하지는 못하다면 그의 '감히 가르치려 드는 행위'를 짜증스럽게 여기거나 그가 주장한 내용의 중대한 논리적 약점을 빌미로 그를 몰아붙이게 될 수 있다. 이런 일들은 서로 간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 있고, 다툼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잘난자가 이런 저런 인연, 의리 따위로 못난자와 인연을 맺고 그를 소중히 여기게 되어 그를 그 어리석은 상태로 방치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상황이리면 어떤 방식으로 그자를 구제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못난자 스스로 자신의 문제점을 깨닳을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유도해주는 길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게 만들기는 도움 주는 사람이 소크라테스 정도로 현명하지 않으면 성공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할게 될 때가 많다. 직접 그에게 충고를 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어쨌거나 직접적으로 개입을 하는것이다.


이렇게 직접 개입해보는 방식은 어리석은자가 타인의 삶에 관여해보고자 하는 방법과 외형상 비슷하기 때문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어리석은 참견'을 '현명한 충고'라고 착각하게 될 여지가 있다. 한편,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일 자질조차 없는 자의 눈에는 '현명한 충고'가 '어리석은 참견'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는 예수께서 생전에 활동한 포교 방식이 일반적으로 기대될만한 구세주의 모습과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훗날 사이비 교주들이 자신을 정말로 신의 아들이라고 굳게 믿게되는 구실을 마련하게 된 점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신성모독 아니니 흥분하지 말고 주석 참조)

그렇다면 '당신를 위해서 하는 말'이랍시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 저 사람이 잘난자인지 못난자인지 어떻게 구분해 낼 수 있을까? 듣는자의 분별력로 그에 관한 판단을 하는것은 정확한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어리석은자의 참견은 누구나 그것이 주제넘은 참견임을 구분해 낼 수 있다. 하지만 현명한 충고나 조언등의 직접적인 개입은 때때로 어리석은 자를 일깨우기도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것조차 할 수 없는 멍청한 자에게는 쓸데없는 참견으로 들릴수가 있다.

그러다보면 병림픽 개최 성공이다.(2013년 3월 추가한 문장)

실생활에 활용하기 위해선 이런 방법을 사용해볼 수 있다. 충고에 앞서
"이렇게 말하는건 주제넘은 참견이 될 것 같지만 네가 괜찮다면 한마디 해 보고 싶은데...."
라고 덧붙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말은 추후 상대가 느낄 반감을 미리 누그려뜨릴 수 있다. 또한 말하는 스스로도 인간인 이상 실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에 약간의 오류가 있거나 전달상의 문제로 못해서 생기는 말의 헛점에 대해 일찌감치 면피할 수 있게 되어 유용한 방법이다.
상대가 반감을 가진다면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고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주장의 약점이 어디있는가에 대해 집중할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한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사소한 실수가 있을 수 있다. 반감을 품은자는 이런 사소한 실수에 대해서 말꼬리라도 잡고 늘어지게 될 여지가 있다.



그러면 감정 상하는 소모적 논쟁이 시작된다. 병림픽 유치 성공이다.(이 줄은 2013년 3월 시점에 끼워넣은 문장임)



'너나 잘해라' 라는 질책에 대한 대답을 미리 준비해보자면, 어리석은 상태로 남아있지 않기위해 나름대로 신경쓰고 있다는것 정도로 변명해 볼 수 있을까?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내가 어리석지 않다는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내게 계몽 의무가 없음을 일찍 깨달았고, 타인에 대한 참견은 최대한 피하며 살았었다.(이 줄은 2013년 3월 시점에 끼워넣은 문장임)


주석: 독해능력이나 논리력이 다소 떨어지는 사람들, 혹은 예수만 나오면 일단 눈이 뒤집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족을 달아봄.
이 문장은 현명한자와 예수를 연결하고, 못난자와 사이비교주를 연결하는 문장구조상 신성모독으로 볼 수 없음. 다시 말해 충고와 참견의 외형적인 유사성 때문에 구분이 난해해진다는 점에 대한 예시에 불과함.

Posted by 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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