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나발(Nabal, נָבָל)의 왕비

누미 2025. 7. 17. 07:33

1. 갈멜 언덕의 불청객

 

갈멜의 언덕은 양털 깎는 축제의 열기로 흥건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굽는 양고기 기름 냄새와 뒤섞여 공기 중에 짙게 배었다. 그 모든 소음의 중심에 나발이 있었다. 그는 왕좌 대신 포도나무 그늘 아래 놓인 튼튼한 의자에 앉아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가 이 땅의 왕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술잔이 기울 때마다 주변의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는 자수성가한 거물이었다. 맨손으로 바위를 깨 목초지를 일구었고, 그의 목소리는 양 떼를 모는 천둥이었으며, 그의 눈은 약탈자의 그림자를 먼저 읽는 매의 것이었다.

그때였다. 축제의 소란을 가르고 낯선 사내 둘이 걸어 들어왔다. 다윗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정중했지만, 그들의 눈에는 광야의 먼지와 허기가 묻어 있었다. 그들은 나발의 종들, 즉 그의 목동들을 자신들이 어떻게 지켜주었는지 설명하고, 축제의 음식을 조금 나누어달라 청했다.
술잔을 기울이던 나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술에 취한 듯 껄껄 웃었지만, 그 웃음소리에는 얼음 같은 냉기가 서려 있었다. 축제의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다윗? 그게 누구더라? ...아..! 사울 폐하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친 이새의 아들 말이냐?”

나발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윗의 부하들 앞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요즘은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놈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산적질을 한다더니, 바로 너희들이었구나! 내가 내 피땀으로 거둔 이 귀한 축제 음식을, 너희 같은 거지 떼에게 나누어 줄 것 같으냐!”

나발은 옆에 있던 양을 한 마리 붙들고서 날카롭게 벼려진 청동 가위를 꺼내들고  능숙하게 빠른 속도로 털을 깎기 시작했다. 그리고 빈정대는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내가 가진 삼천마리의 양과 천마리의 염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야. 나는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양 열 마리를 가지고서 이 모든 것을 이루었지. 양과 염소가 한 마리 한 마리 늘어나는 것은 내 인생의 기쁨이었어. 지금 내가 털을 깎고 있는 이놈하고 저기 통째로 구워지고 있는 저 놈이 태어난 날도 나는 기억하고 있지. 그런데 감히 목숨과도 같은 내 재산을 산적 떼나 다름없는 너희에게 내어달라고? 내게서 뭐라도 얻어먹고 싶으면 이렇게 아무 놈이나 붙들고 털이나 깎아서 저쪽 바구니에 쌓아 보거라. 그러면 너희 두 사람은 배부르게 먹여주마."


그의 발 아래에 그가 깎고 있는 양털이 구름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다윗의 부하가 발끈하면서 대꾸했다.
"제가 모시고 있는 다윗 장군은 산적이 아닙니다. 그는 다시 없을 영웅이십니다. 혹시 모르고 계십니까? 골리앗을 쓰러뜨린 그 다윗입니다. 사울왕은 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만 명을 죽였다는 노래 속의 바로 그 다윗 말입니다."

나발은 비웃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알고 있네. 그 놈은 사자나 곰이 양을 물고 가면 반드시 쫓아가서 무릿매로 돌덩이를 날려서 양을 되찾았다지? 한가닥 하는 양치기임에는 틀림없어. 그런데 네 놈들이 밟고 있는 그 바닥 깔개 말이야, 짐승 가죽 치고 꽤 크지 않나? 그거 곰가죽이야. 나는 곰이 양을 노리면 단지 쫓아내는대서 끝내지 않고 반드시 그 곰을 사냥했지. 살려두면 다음에 또다시 나와 내 양을 괴롭힐 테니까. 곰이든 사자든 이 무릿매에 묵직한 돌을 끼워서 골통을 박살 내 버린단 말이지. 네 우두머리도 무릿매를 제법 잘 쓴다고 하니 받아달라고 간청한다면 양치기로 받아주긴 하겠다."

나발은 무릿매를 허리띠처럼 차고 있었는데 풀어서 그들에게 보였다.
"너희들이 감히 우릴 보호했다고? 입은 삐뚤어졌더라도 말은 바로 해야지. 너희가 지내는 그곳에 별다른 맹수들이 없는 건 전적으로 과거에 내가 하인들을 데리고서 거기를 한번 휩쓸었기 때문이야. 거기는 한때 산더미 같은 늑대들의 사체가 썩어가던 무덤이었지. 누가 누굴 보호해?"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 모인 모든 지역 유지들의 귀에 똑똑히 박혔다. 한 부하가 감히 입을 열려 하자, 나발이 손을 들어 막았다.
“내가 네놈들 우두머리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다. 사울 폐하께서 블레셋 놈들의 포피 100개를 가져오라 시켰는데, 그 미친놈이 200개나 가져왔다지?”

나발은 좌중을 둘러보며 경멸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너희가 따라 다닐 만큼 싸움은 제법 할 줄 아는 모양이야. 근데 말이야, 그 새끼는 남창이라도 되나 보지? 남의 자지 만지는 걸 그리도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심지어 죽은 사람의 것 까지 말이야. 100개면 된다는데 굳이 100개나 왜 더 잘랐을까? 너도 항상 조심하거라. 혹여나 그놈이 내 것은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나는 이미 할례를 받았으니 말이야. 하하하하! 폐하께서 왜 그놈을 그렇게까지 죽이고 싶어 하시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나라도 그랬을 게다.”

사방은 죽음 같은 침묵에 잠겼다. 이것은 단순한 모욕이 아니었다. 다윗의 영웅 서사를 더러운 농담으로 전락시키고, 그의 남성성과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능욕하는 선전포고였다.
다윗의 사자는 그의 폭언에 경악하며, 얼굴이 붉어져서 소리쳤다.
"손님을 환대는 못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모욕하시다니, 주님의 율법을 잊으신 겁니까?"

나발은 실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율법이고 뭐고 늑대랑 사자가 감히 내 양에게 해를 끼치면 나는 끝까지 쫓아가서 그 놈을 사냥할 뿐이다. 그게 내가 유일하게 따르는 나의 율법이다."

다윗의 부하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섰다. 그들의 등 뒤로, 나발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칼날처럼 날아와 꽂혔다.
"안심하거라. 네 놈들은 아직은 구걸만 했을 뿐이니까 해치지 않겠다. 그리고 그 이새의 아들놈, 도전하고 싶으면 언제든 무릿매를 들고 오라고 해. 그놈이 골리앗에게 했듯이 대가리를 언제든 부서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나발은 무심하게 무릿매에 돌을 얹고는 태연하게 그것을 날렸다. 그는 술에 취했지만 그가 날린 돌은 돌아가던 다윗의 사자가 허리에 찬 칼자루 끝의 장식을 정확하게 맞춰서 깨뜨렸다. 그는 사자의 등 뒤로 끝까지 모욕하는 말을 던졌다.
"저주받은 블레셋 놈들이나 들고 다니는 그 꼬챙이는 어디서 훔쳤느냐? 그런 장난감으로는 양털도 제대로 못 깎는다. 진짜 사내는 이런 돌멩이 하나로도 사자의 숨통을 끊을 수가 있지!"

 

 

 

2. 분노의 칼

 

빈손으로 돌아간 사자들은 다윗에게 소식을 전했다. 천막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다윗의 사자들이 전한 나발의 말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야의 모래알 하나하나에 스며들 만큼 교만하고 독이 가득한 모욕이었다. '주인에게서 도망친 종놈들', '남창이라도 되나 보지?', '그 꼬챙이는 어디서 훔쳤느냐?' 단어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날아와 다윗의 심장에 박혔다. 그의 부하들은 숨을 죽인 채, 분노로 굳어진 사령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윗의 턱 근육이 꿈틀거렸고, 평소 사려 깊던 그의 눈은 이제 이글거리는 아궁이처럼 변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찬 칼자루로 향했다.

“이것은 나 다윗 개인에 대한 모욕이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천막 안의 모든 것을 진동시킬 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내가 사울왕을 피해 이 광야를 떠도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요, 나에게 기름을 부으신 주님의 뜻이다. 저 오만한 자, 나발은 나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이 아니라, 나를 세우신 주님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의 죄는 주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능멸한 반역죄다!”

 

다윗은 천막 밖을 향해 포효했다.

“병사 400명은 칼을 차고 나를 따르라! 나머지 200명은 소유물을 지켜라! 오늘 밤이 가기 전에, 갈멜 땅에서 나발에게 속한 사내란 사내는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저 불경한 자를 단죄하겠다!”

 

전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광야를 뒤흔들었다. 분노는 전염병처럼 번져, 400명의 눈에 살기가 번득였다. 복수의 열기가 모든 이성을 집어삼킬 듯했다. 바로 그때, 소란의 중심을 향해 한 사람이 조용히 다가왔다. 피로에 절어 있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깊은 눈을 가진 선지자 가드였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막 말에 오르려던 다윗의 팔을 나직이 붙잡았다.

“장군이시여.”

 

가드의 목소리는 주변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다윗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막지 마시오, 가드! 주님께서도 악인이 번성하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이오!”

 

가드는 다윗의 불타는 눈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장군의 칼은 빠르지만, 주님의 걸음은 신중하고 깊으십니다. 그 분노의 칼을 거두라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십시오.”

 

가드의 시선이 갈멜의 언덕 너머, 머나먼 곳을 향했다.

“갈멜로 향하는 그 길 위에서, 장군의 칼보다 먼저 그 길을 예비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말입니다. 너무 서두르시면, 주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실까 염려됩니다.”

 

다윗의 눈빛이 순간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는 광야에서 수없이 가드의 지혜를 통해 목숨을 구했었다. '주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라는 말이 그의 불타는 이성에 찬물을 끼얹는 듯했다. 그러나 이미 온몸을 지배한 치욕과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가드의 손을 뿌리치고 말의 안장에 올랐다.

“가드여, 주님의 계획도 때로는 인간의 칼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이오! 그 예비하신 것이 나의 칼끝에 있다면, 내가 친히 거두어 올 것이오!”

 

다윗은 말머리를 돌려 거친 함성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400명의 칼날이 저녁 햇살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들의 등 뒤에 홀로 남은 가드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길을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어리석은 자여… 주님께서 예비하신 것은 칼이 아니라, 칼을 막는 손이거늘…”

 

그의 예언은 먼지 바람 속에 흩어졌지만, 이미 보이지 않는 신의 계획은 다윗의 군대보다 한 발 앞서 갈멜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편 나발의 저택에서 한 젊은 종이 숨을 헐떡이며 안채로 달려왔을 때,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마님, 주인 어른께서 다윗의 사자들에게 큰 모욕을 주시고 쫓아내셨습니다. 저는 그들의 허리춤에서 번쩍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나 쓴다는 그 차갑고 검은 쇠붙이... 철검이었습니다. 햇빛에 반사되는데, 우리 청동 단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서슬 퍼런 빛이었습니다.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그를 따르는 600명의 장정 중에 400명이나 그런 검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종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은 그녀의 총명한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하나의 끔찍한 그림으로 완성되었다. ‘파멸’.
그녀는 남편의 오만과 자부심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자신감이 아니라 자멸을 향해 폭주하는 광기였다. 남편은 아직도 돌멩이의 위력을 믿고 있지만, 시대는 이미 변했다. 저 단단한 쇠붙이가 이 땅의 새로운 왕이 될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으로 몇 년 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발이 올리브 나무를 없애고 그 자리에 포도 나무를 심기로 했을 때였다. 고용한 일꾼들은 청동 도끼와 쐐기, 나무망치로 그 굵고 단단한 나무를 자르기 위해 낑낑댔으나 끈쩍한 수액만 덮어썼을 뿐, 상황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오후 늦게 도착한 헷(히타이트) 출신 일꾼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희뿌연 잿빛이 도는 도끼를 꺼내들었다. 다른 일꾼 여러 명이 한나절 씨름해도 겨우 흠집만 낼 수 있었던 수백 년 된 올리브나무를, 그 헷 사람은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거짓말처럼 쓰러뜨렸다. 청동 도끼로는 아무리 때려도 튕겨져 나가기만 했던 단단한 올리브나무 속살이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마치 썩은 나무처럼 갈라졌다. 뒤늦게 도착한 그 일꾼은 특별히 더 많은 품삯을 챙겨갔고 그날 아비가일은 철이라는 금속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것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 될 것이다. 다윗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 광야에서 철기로 무장한 400명의 장정들을 거느린 자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는 남편과 그의 부하들이 얼마나 용감한지는 알고 있었지만 무릿매와 돌창, 청동검으로 그들과 맞붙는 건 자살과 다름 없었다. 이것은 협상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아비가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장부를 덮었다. 이제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곧 잿더미가 될 것이었다. 그녀는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빵, 포도주, 양고기, 건포도, 무화과. 가문의 모든 것을 긁어모아 나귀에 실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다윗의 칼이 갈멜의 언덕을 붉게 물들이기 전에, 그녀가 먼저 도착해야 했다.

 

 

 

3. 성령의 광휘

언덕 아래 좁은 길목에서 그녀가 마주친 다윗의 눈은 분노로 불타는 숯과 같았다. 그가 무장시킨 400명의 병사들이 뿜어내는 살기는 공기를 얼어붙게 할 정도였다. 아비가일은 나귀에서 내려 그의 발 앞에 얼굴을 묻었다.
"위대한 영웅이시어. 그대의 명성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천 명을 죽였고 다윗은 만 명을 죽였다는 노래의 주인공, 바로 그분이 당신이시지요? 저는 오래전부터 장군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제 남편 나발이 어리석다는 뜻을 가진 그 이름답게 참혹하게도 장군의 부하들에게 큰 결례를 범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그이는 성실한 사람이지만, 술버릇이 좋지 않습니다. 그이는 술에 취하면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사람 누구에게든 극심한 모욕을 퍼붓는 오래된 병이 있답니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빚진 게 없이 모든 것을 이뤘다는 자부심이 그이를 무모한 오만에 빠뜨리게 한 것이지요."

다윗은 차가운 목소리로 아비가일에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시오. 그대는 내 종이 아니오. 그렇게 비굴한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부하들은 아녀자는 해치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그리고 이러신다고 그의 모욕이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일어서지 않고 엎드린 채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당신 앞에 엎드린 것은 당신의 종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리석은 제 남편을 대신하여 진심 어린 사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남편이 한 일은 곧 제가 한 일입니다. 저는 감히 당신의 얼굴을 마주할 염치가 없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마땅히 안주인인 제가 했어야 할 일입니다. 외간 남자를 상대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바깥일로 여기고서 만취한 남편에게 맡겨버렸습니다. 씻을 수 없는 저의 실책이었습니다. 어떻게 장군님의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아비가일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윗은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아름답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만으로도 호기심이 동했다. '어떻게 생긴 여인일까?'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마침내 아비가일이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 기이한 침묵이 다윗의 등 뒤를 감쌌다. 방금 전까지 피에 굶주린 늑대처럼 번득이던 400명 장정들의 눈이, 일제히 한 곳에 멎어 있었다. 먼지와 눈물 자국으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고결한 슬픔이 깃든 검은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강인함, 흐트러진 머리카락마저도 그녀의 기품을 해치지 못했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천사가 현현한 듯한 모습이었다.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무심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누군가의 칼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또 다른 이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훔쳐보기를 반복했다. 전장을 누비며 죽음을 일상처럼 마주했던 거친 사내들이 한 여인 앞에서 소년처럼 당황하고 있었다. 몇몇 부하들은 시선을 돌리려 애썼지만, 또 다른 이들은 마치 환상을 보는 듯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한 늙은 전사가 옆의 동료에게 속삭였다.

"저런 여인이 어떻게 그 야만스러운 나발의..."

그러나 그의 말은 다윗의 날카로운 눈빛에 꼬리를 감췄다. 그들은 광야의 모래바람 속에서 피어난 한 떨기 수선화, 혹은 신이 빚어낸 조각상을 마주한 듯 넋을 잃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서슬 퍼런 철검의 살기가, 그녀의 존재 앞에서 무색하게 녹아내리는 듯했다. 몇몇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오오... 주여..."

다윗은 등 뒤에서 일어난 미묘한 공기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한 여인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400자루의 칼보다 더 날카롭게 군대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이었다. 그는 저 자신 역시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도피 생활로 잊고 지냈던 여인의 향기와 아름다운 눈물은 강력한 힘이 있었고, 오랜 금욕은 그의 마음을 속수무책으로 흔들었다. 더욱이 그녀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모에만 있지 않았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지혜롭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 자신을 낮추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그 자태,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신비감이 더욱 그녀를 빛나게 했다. 다윗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 오만방자한 야만인에게... 이토록 과분한 아내가?'

 

그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다윗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제 어리석은 남편이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에게 바치지 못한 것들을 못난 아내인 제가 가져왔습니다. 부부는 하나의 몸입니다. 이것은 저의 남편이 장군님께 손수 바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을 부디 받아주시고 제 남편과 저희 목장에 대한 노여움을 풀어주신다면 저는 이 자리에서 장군의 칼에 베여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습니다."

그녀의 입에서는 지혜와 겸손으로 빚어진 말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남편의 죄를 자신에게 돌리고, 다윗의 위대한 미래를 상기시켰으며, 무고한 피를 흘려 그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분노로 이성을 잃은 거인의 발목을 감아쥐는 부드러운 쇠사슬과도 같았다. 다윗과 그의 전사들의 눈에서 이글거리던 살기는 이제 온데간데 없었다. 다윗은 이미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녀의 용기와 지혜에 감탄했으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신과 신비한 고귀함이 느껴지는 그녀가 특별한 운명으로 이어져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의 동요와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러서자니 400명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고, 나아가자니 이 알 수 없는 거룩한 기운이 발목을 잡았다. 그때, 그림자처럼 다윗의 곁으로 다가온 이가 있었다. 광야의 먼지를 뒤집어쓴 예언자의 옷을 입은 선지자 가드였다. 그는 소란의 중심에 선 아비가일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직하지만 다윗의 심장을 울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장군님. 저 여인을 자세히 보십시오."

다윗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알고 있네, 가드. 나도 느끼고 있어...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야."

가드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장군님, 제가 선지자가 된 이후로 이런 강렬한 성령의 임재를 느낀 적이 없습니다. 저 여인 주변에는 주님의 계획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령께서 저 여인을 친히 감싸고 계십니다. 주님의 손이 막으시는 분노를 굳이 터뜨리지 마십시오. 장군님. 주님의 뜻에 거역하지 않고 기다리시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풀릴 것입니다. 저 어리석은 자(나발)는 이미 주님의 심판 아래에 있나니, 그를 치는 일은 주님께 맡기시고, 순종하는 종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자비를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가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예언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다. 신의 음성이 가드를 통해 흘러나오는 듯했다. 그는 아비가일에게 시선을 돌리며, 그녀가 신의 도구임을 새삼 느꼈다. 가드의 말은 혼란스러운 다윗의 마음에 내리꽂히는 닻과 같았다. 그렇다. 이것은 후퇴가 아니다. 신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그는 군중 앞에서 물러설 명분을 얻었다. 아니, 물러서야만 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다윗은 성스러운 아우라를 뿜어내는 아비가일과의 인간적 관계에서 회복할 수 없는 파탄을 만드는 것이 두려워졌다. 오늘 크게 피를 흘리는 것은 더이상 명분도 실리도 없고 무엇보다도 마음속으로 내키지도 않게 되었다. 다윗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아비가일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지혜와 그녀를 보낸 신을 향한 경외심을 담아 말했다.

"자비로우신 여호와의 종으로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대의 사죄를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을 시켜 그녀가 챙겨 온 물자들을 받게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날, 아비가일은 잿더미가 될 뻔했던 자신의 왕국을 구했다.

 

 

 

4. 어리석음(Nabal, נָבָל)을 치시매 그가 죽느니라.

 

다음 날 아침, 밤새 이어진 축제의 술기운에서 깨어난 나발 앞에 아비가일이 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잠 못 이룬 피로와 비장함이 함께 서려 있었다. 그녀는 지난 밤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담담하게 고했다. 다윗의 분노, 철검으로 무장한 400명의 살기,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그 재앙을 막았는지를.

이야기가 끝났을 때,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발의 얼굴은 회반죽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처음 맺힌 것은 낙담이 아니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분노였다. 그는 곁에 있던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고, 그 위에 있던 청동 술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감히! 그 이새의 종놈 따위가!"

 

그의 목소리는 천둥 같았다. 분노는 아비가일이 아닌, 다윗을 향해 있었다.

"그 도망자 놈이 감히 내 아내를, 이 나발의 왕비를 흙바닥에 무릎 꿇게 했단 말이냐! 당장 하인들을 모아라! 내 무릿매와 창을 가져오너라! 내 양을 노리는 늑대 떼는 모조리 사냥하는 것이 나의 율법이다. 그놈들의 시체를 광야에 던져 독수리의 밥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발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씩씩거렸다. 평생 그를 지탱해 온 원칙, 자신을 위협하는 것은 누구든 박살 내버린다는 그 원칙이 그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차갑고 슬픈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무엇으로 싸우실건가요?"

그 한마디에 나발의 움직임이 멎었다.

"우리의 청동 단검으로 그들의 철검을 막으실건가요? 몇 년 전에 헷 사람 일꾼이 올리브 나무를 혼자서 잘라 버렸던 기억이 안 나세요? 술에 취해 잠든 목동들로, 피에 굶주린 600명의 전사와 맞서시려고요? 여보, 어젯밤 그들이 들이닥쳤다면 그것은 싸움이 아니었을 거예요. 도살이었겠죠.. 우리는 저항 한번 못 하고 목이 잘렸을 것이고, 당신이 평생 일군 이 모든 것은 잿더미가 되었을 거예요."

 

아비가일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없었다. 오직 끔찍한 사실만이 담겨 있었다. '철검'. '600명'. '도살'. 그 단어들이 비수처럼 날아와 나발의 심장에 박혔다. 그의 이글거리던 분노는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무릿매를 내려다보았다. 한때 사자와 곰의 두개골을 부수던 자랑스러운 무기였다. 어쩌면 지금도 몇 명 정도는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서슬 퍼런 철검을 앞세운 수백 명의 부대 앞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아끼던 용감한 부하들은 한낱 사냥꾼들에게 몰이를 당하는 짐승들처럼 무력해 보였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사냥해야 했던 곰은 다윗이 아니었다. 어젯밤, 자신의 오만함에 취해 왕국이 통째로 잡아먹힐 위기에도 잠에 빠져 있던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평생을 포식자로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실은 우리 안에서 안전하게 잠자던 가축에 불과했다.

분노는 갈 곳을 잃고 안으로, 자기 자신을 향했다. 그의 시선이 아내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당신이 그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 아내가 흙바닥에 얼굴을 묻고…"

 

그것은 더 이상 분노가 아니었다.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자의 공허한 절규였다. 아내가 겪어야 했던 굴욕의 장면이, 자신의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그의 눈앞을 채웠다. 아내가 자신을 구원한 방식이, 역설적으로 자신이 실패자임을 증명해 버린 것이다. 이 모순을 그의 자부심은 견뎌낼 수 없었다.

 

그는 무언가 더 소리치려 했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서 팽팽하던 끈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빙글 돌고, 혀가 굳었다. 그의 입에서 의미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고, 그는 의자에 앉은 채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며칠간 마셔댄 포도주의 술기운이 극심한 자기 혐오와 무력감 그리고 무가치한 자 앞에서 굴욕을 기꺼이 감내한 아내에 대한 죄의식과 힘을 합해 그의 뇌혈관을 찢어버린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거대한 왕국을 세웠던 나발은, 외부의 적이 아닌 자기 안에서 터져 나온 모멸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자신의 옥좌에서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쓰러지고 나서 첫째 날, 나발은 겨우 눈을 떠 아비가일을 보았다. 그의 입술이 힘겹게 움직여 마음 속에 숨겨 둔 한 단어를 뱉었다.
“...미...안...”
아비가일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나발은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갈멜에는 몇몇 약초꾼들만 오갈 뿐, 변변한 의사는 없었다. 아비가일이 나발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의 소변을 치우는 것뿐이었다.
셋째 날, 나발의 정신이 과거로 헤맸다. 그는 텅 빈 눈으로 천장을 보며 속삭였다.
"..포...도...”
아비가일은 나발의 벌어진 입안에 포도알을 밀어 넣어봤으나 그는 씹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그녀는 올리브 나무 자리에 새로 심은 포도나무 아래를 남편과 함께 거닐며 잘 익은 포도알을 서로의 입안으로 주고 받으며 사랑을 나눴던 기억에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는 아직 저 허물어진 육신 안에 있었다.

 

열흘째 되던 날, 그의 몸이 썩어가기 시작했다. 욕창이 생기고, 악취가 피어올랐다. 그는 더 이상 의미 있는 단어를 말하지 못했다. 오직 짐승 같은 고통의 신음만이 그의 목에서 새어 나왔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너져 내리고, 고통받는 살덩어리만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아비가일의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이것이 진정 살아있는 것인가?' 그녀는 며칠 밤낮으로 신께 기도했다. '주님, 어찌하여 저를 시험하시나이까. 선지자 가드는 모든 것이 순리대로 풀릴 것이라 하였는데, 이 끔찍한 고통이 주님의 순리입니까?'

그녀는 선지자의 말을 곱씹었다. '기다리라.' 그러나 무엇을?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방 안은 촛불의 미세한 흔들림 외에는 모든 것이 고요했다. 아비가일은 남편의 앙상하고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때, 기적처럼, 나발의 눈이 그녀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끝없는 고통과 애원만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입술이 마지막 남은 모든 힘을 다해 움직였다.
"…사…랑…해…"

그 한마디에 아비가일의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것은 사랑 고백이 아니었다.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의 손에 이 고통을 끝내달라는 마지막 신뢰이자, 간절한 허락이었다. 바로 그 순간, 아비가일은 깨달았다. 이것이 바로 신의 응답이자, 그녀가 기다려왔던 '순리'의 시작임을.

그녀의 귓가에, 환청이 아닌 분명한 확신으로 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인아, 그를 치거라. 네가 아니라 내가 치는 것이다. 내 손이 된 너를, 나는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선지자 가드의 예언이 이런 의미였단 말인가. '기다림'은 무위가 아니라, 신의 때가 이르러 자신의 손에 신이 부여한 의무가 내려올 때까지의 인내였던 것이다. 아비가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푹신한 베개를 집어 들었다. 나발은 눈을 길게 깜박여서 그녀에게 동의를 표했다. 그녀의 손은 격렬하게 떨렸지만, 눈빛은 슬프도록 단호했다. 그녀는 몸을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여보. 이제 편히 쉬세요. 이 고통은… 제가 끝내 드릴게요. 사랑했어요… 정말로.”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베개를 남편의 얼굴 위로 가져갔다. 미약한 저항이 베개 너머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내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아비가일은 한참 동안 베개를 누른 채 흐느꼈다. 소리 없는 눈물만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비가일은 떨리는 손으로 베개를 치웠다. 평온해진 남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미안해요, 나발.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녀의 지혜는 가문을 구했지만, 그녀의 사랑은 남편을 죽였다.

 

 

 

5. 은혜로운 선물

 

다윗은 그 오만한 무뢰배의 죽음을 전해 듣고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 아름다운 안주인은 오래 전부터 나를 흠모해왔다고 말했었지. 그날은 살아남기 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한 것 같았지만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 말을 진심이라고 믿어주고 싶군.'

 

다윗은 신에게 감사 기도를 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저에게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종을 이토록 보살펴주시니 황송함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아비가일에게 청혼을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혜가 가장 중요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발의 모든 재산의 상속자였고 그것은 그가 세력을 유지하는데 든든한 기반이 되어 줄 것이었다. 아비가일은 압도적 무력을 가지고 있는 다윗의 청혼을 거절할 용기가 없었다. 전과 같이 바닥에 엎드려서 목숨을 구걸하듯 그의 청혼을 받아들일 뿐이었다. 아비가일이 땅에 얼굴이 닿도록 절을 하며 말하였다.
“저는 그분의 계집종이 되어 기꺼이 그분을 섬기고, 그분을 섬기는 종들의 발을 씻어 드리겠습니다.”(읽기쉬운성경, 사무엘기상 25:41)

아비가일은 여종 다섯 명을 이끌고 나귀를 타고 다윗의 시종을 따라가면서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리 잡은 나발을 향해 이렇게 속삭였다.

'여보, 당신이 피땀으로 쌓아 온 모든 것이 원수의 손에 넘어가고 있어요. 당신의 아내로서, 이 모든 것을 지켜내지 못한 저를 용서하세요.  이렇게까지 살아남고 싶진 않았지만, 제 목숨이 혼자만의 몫이 아니란 걸 깨달았어요. 저는 선택해야만 했어요. 이렇게 저는 우리 하인들의 생명을 구했고, 앞으로도 당신의 종이었던 그들을 보호하겠어요. 그리고 당신이 맨손으로 일궈왔던 이 땅을 기필코 지켜낼 겁니다. 이것이... 당신의 어리석음(Nabal, נָבָל)을 사랑했던 제가 당신에게 바칠 수 있는 마지막 진심이에요. 그러니 부디, 항상 제 곁에서 저를 바라봐 주세요.'

 

혼례를 치르고 며칠이 지난 어느 밤, 다윗은 자신의 새 신부가 된 아름다운 아비가일에게 물었다.

"그 교만하고 사나운 양치기의 최후가 궁금하오. 대체 그는 어떻게 죽은 것이오?"

 

아비가일은 빛을 잃은 눈으로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날 당신과 만나서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그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열흘이 지나자 주님께서 그를 치셔서 위태롭게 붙어있던 목숨을 끝내 거두어 가셨습니다."

 

다윗은 그저 '주님의 심판이 임했구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비가일의 대답 속에 숨겨진 끔찍하고도 신성한 비밀, 즉 '주님께서 그녀의 손을 통해 그를 치셨다'는 진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성경의 기자는 나발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했다.

 

[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38]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개역한글, 사무엘기상 25:37-38)

 

한숨 길게 내쉰 다윗은 납작해진 촛불 심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일하셨구려… 그분께서 그대 마음의 상처까지 거두시길 기도하리다.”

하지만 신은 다윗의 그 기도만은 쉽사리 들어주지 않았다. 아비가일은 잠시 가드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으나 머지않아 이스라엘의 왕비가 되었고, 다윗의 둘째 왕자 길르압(=다니엘)을 낳았다. 신은 아비가일을 사랑하였다. 다윗 집안의 연이은 칼바람에 첫째 암논, 셋째 압살롬, 넷째 아도니야 왕자들이 차례로 스러질 때, 신은 그들 모자의 옷깃에 핏방울이 스미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