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예정설과 자유의지의 조화 모색

누미 2025. 6. 26. 19:10

지난 며칠간 어떤 유튜브 썸네일이 눈에 거슬렸다. 성도들 중 구원받을 사람이 1% 미만이라는 글자였다. 무시하고 지나쳐도 며칠 동안 자꾸 추천 영상 리스트에 떠서 무시한다고 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클릭해 보니 영상 제작자는 지독한 칼뱅주의자였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칼뱅의 이중예정론에 따르면 1% 미만인 구원받을 사람의 비율은 신이 창세 전에 설정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라서 추론해 보면 신은 자기가 만든 것을 대부분을 유기해서 영원한 고통을 주는 성격 파탄자인 셈인데, 전선함이라는 속성을 스스로 깨는 모순적인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사랑과 회개를 강조한 예수를 거짓말쟁이이자 위선자로 전락시키는 위험이 있다. 99% 넘는 사람이 유기될 운명인 상황에서 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것은 전적인 선함보다는 지극히 가학적인 성품에 가깝다.  과연 1% 미만을 운운하는 그런 과감한 주장은 어떤 근거에서 나왔을까가 궁금해졌다.

그가 자랑스럽게 제시한 신학적 근거는 상당한 허탈감을 동반했다. 그는 칼뱅이 아래와 같은 취지의 주장을 했다는 점으로 자신의 헛소리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아 보였다.
'수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천국에 가는 방법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몇 명 없다.'
그는 이렇게 자신만의 주장을 이어 나갔다.
따라서 내가 말한 1%도 사실은 아주 관대하게 잡은 것이다. 실제로는 0.00...x퍼센트 쯤 될 것이다. 참고로 나는 얼마 전에 주님과 영적으로 소통했다.(여기부터는 나의 상상임: 그러므로 나는 그 극소수에 포함될 것 같다. 나 혼자만 천국에 갈 테니 영상을 보는 너희는 지옥에나 가라. 쏘롱 루저스.)

이 사람은 천국에 가는 방법을 궁금해하는 것과 신이 은총을 준 것을 같은 의미라고 임의적으로 선언한 셈이었다. 하지만 예정설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선택을 받았다면 그는 무엇을 하든 말든 심지어 죄를 짓더라도 단지 은총을 받아 구원을 받을 뿐이다. 이를 칼뱅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천국 가는 방법을 궁금해한다고 해서 은총을 받지 않은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어쩌면 죄를 지은 사람일수록 천국에 가는 방법이 더 절실하게 궁금해질 수도 있다. 특별히 큰 죄를 지은 게 아니라면 '나는 성도의 견인에 의하여 성화과정이 잘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안심하며 그 방법에 대한 궁금함 자체가 떠오르지 않기가 쉽다. 그리고 애초에 천국에 갈 방법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칼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자백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남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의 수준조차도 이 정도니, 복음서의 내용인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도 제대로 설명하는 사람을 발견하기가 어려운 참담한 현실이 어느 정도 수긍되기도 했다.


근거 없는 영적 오만에 가득 찬 그 사람, 그리고 사실상 자기가 지옥갈 예정이란 악담을 들었단 점을 애써 무시하며 자기만은 은총을 받은 특별한 존재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고양감에 빠져서 그를 추종하는 댓글을 단 사람들의 무지몽매함에 대한 순수한 멸시감을 잠시 느끼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파심으로 덧붙이는데 멸시감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무지몽매함과 지적 게으름이었다.)

'이런 정신 나간 사람들이 큰 목소리를 내고 댓글 수준 역시 비판은 없고 칭송과 찬양 위주로  가득한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차라리 내가 직접 이중예정설과 자유의지론을 조화시켜서 더욱 성경 적합도가 높은 이론을 도출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다소 오만방자하고 발칙한 생각이었다. 두 가지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있을 때는 장점끼리 섞어보면 원재료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오기 마련이다.

칼뱅의 아이디어는 로마서 9장에 근거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성경 적합도가 인정될 수는 있다. 그러나 신의 전적인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서 특정 구절과 한정된 해석에 집착할 뿐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과의 조화를 간과한 측면도 있다. 칼뱅은 구원받을 사람은 창세 전에 이미 신이 정했다고 주장했다. 칼뱅에 따르면,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신이 창세 이전부터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는 결론을 낳는다. 그렇게 해야만 신의 전지함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이 자신의 속성을 지키려고 인간을 타락시키고 유기하는 존재라면, 두 가지 심각한 의심이 생긴다. 첫째, 신은 선하지 않다. 둘째, 신의 지능이 모자란다.

그런데 나는 거룩하고 사랑에 충만한 존재인 신을 이런 불경한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몰아넣고 싶지가 않다. 그렇다고 알 수 없는 섭리라는 탈출용 만능키에 동의할 생각도 없다. 요한복음 15장 15-17절에서 예수는 알 수 없는 신의 섭리 같은건 없다고 명백하게 밝혔다.
[15]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새번역)

 

선악과 사건으로 인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아담 부부가 저지른 죄의 유전은 다양한 신학적 논의와는 달리, 성경 텍스트 상에서는 어디까지나 바울 혼자의 주장일 뿐이었다. 막상 성경을 읽어보면 다른 선지자들나 예수는 성경 텍스트 안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에스겔서 18장에는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라는 죄의 유전을 상징하는 속담에 대해서 신이 직접 목소리를 내서 비판했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항상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같은 절실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애써 왔었다. 바울은 물론 훌륭한 사도다. 그렇지만 그의 말이 예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면 다른 해석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회개에 따른 구원을 약속해 왔던 예수의 목소리를 고작 사도인 바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 한 가지로 덮어버린다면 신앙의 위계상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선택적 해석에 크게 의존하는 칼뱅의 생각을 마치 예수의 말과 동등하거나 혹은 예수가 했던 말들을 번복할 권위를 부여하여 따라야 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중예정과 자유의지를 모두 만족시키고 성경 텍스트 적합도도 기존보다 높은 대안적 해석을 제시해 보겠다.

1. 모든 인간은 전적인 타락 상태에 있고 오직 은총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다. 

2. 누구를 구원할지는 전적으로 신의 주권이고 신이 미리 정해줬다. 신이 정한 사람은 하와처럼 잘못된 자유의지 행사로 혹시라도 죄를 짓더라도 절대 지옥에 가지 않는다.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와 닮아가는 성도의 견인과 성화과정은 구원이 예정된 사람의 증표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은총의 부대적 효과일 뿐, 성화과정 자체가 구원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의 선택을 받았다면 죄인도 구원을 받는다는 이중예정설의 논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 부분은 외부의 시각에서는 죄를 지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칼뱅이 내세운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이라는 교리의 고유 내용이고 이 글은 칼뱅의 입장도 최대한 존중하고 함께 가려는 목적이 있으니 그대로 안고 가기로 한다.

3.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은 무조건 유기되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항상 회개하라고 강조했다. 회개가 아무 의미가 없다면 예수가 복음서에서 내내 그렇게까지 사람들에게 간절하게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는 호소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4. 신은 누구에게 관심을 기울일까? 자기가 구원하기로 예정한 사람? 그렇지 않다. 이미 예정했고 그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결정을 번복할 것도 아니면서 왜 불필요하게 큰 관심을 가지겠는가? 예수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만 쓸모가 있다고 자신의 역할을 이야기했다(마태 9:12,13, 마가 2:17, 누가 5:31,32) 예수의 가르침은 구원이 예정된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유기당할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기 위해서 내려진 것이고 신은 그들의 행동과 신앙에 더 큰 관심을 가진다고 보는 것이 3가지 공관복음들의 일관된 지지를 받는 합리적인 해석이다.

5. 유기될 사람의 회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나타낸다. 예수의 제자들은 신이란, 사랑 그 자체라고 했다. 그렇게도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인 신이 보기에 회개를 하겠다고 아등바등 대면서 신실하게 살아가며 자신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사람을 보면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 건 당연하다.

6. 그렇게 신은 유기될 운명이었던 사람 중에서 열심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듬어서 은총을 내린다. 그렇게 그런 사람들도 구원받는다. 이는 마태복음 7장 7,8절에도 예수의 절실한 목소리로 드러나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자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또한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자의 비유 등 예수는 다양한 방법으로 회개를 할 것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요구했다.

7.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구원은 신실하게 산 사람이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자력으로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너는 비록 더럽지만 네가 절실하게 뭐라도 하는 걸 보니까 그만하면 됐다. 특별히 한번 용서해 줄게."라는 관대한 추가적 은총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아온 탕자를 받아준 힘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 탕자의 울부짖음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세관장 삭개오는 실제로 회개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친히 신과 동일한 존재인 예수로부터 직접적인 구원의 축복을 얻기까지 했다. 예수조차 인정한 삭개오의 회개와 이웃 사랑이 진정 무의미한 것이고 예수는 이미 예정된 사람에게 의미 없는 축복을 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성경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예수를 거짓말쟁이로 전락시키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기왕 유기되었으니 닥치는 대로 악행을 해서 덜 억울해야겠다는 자포자기식 어깃장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 전적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오만을 놓아버리고, 오히려 더욱 신을 사랑하고 경배하게 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칼뱅까지는 모르겠으나 바울의 주장에는 딱히 어긋나지 않는다. 그는 예정설의 근거가 되었던 로마서 9장의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라고 말했고(로마서 10:13)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 신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전선한 신이 자신의 주권만을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유기해 버리는 이중예정설의 성경적 근거가 되었다는 로마서 9장이나 에베소서 1장 역시 칼뱅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도 얼마든지 어렵지 않게 해석하는 게 가능한 구절들이다. 다만 이 글의 목적은 이중예정설과의 투쟁이 아니라 조화이므로 굳이 그 반대 해석 논리를 도출하여 지면과 독자의 집중력을 낭비하진 않겠다. 3가지 공관복음서 모두에서 예수가 부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재산을 전부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마태 19:16-26, 마가 10:17-27, 누가 18:18-27) 인간의 순종과 선행이 영생의 원인이 된다는 논리 구조다. 만약 칼뱅주의자의 흔한 믿음처럼 인간의 행위가 구원과는 전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예수는 그 부자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된다. 그 부자가 은총 받은 자였다면 의무 없는 일을 강요한 것이 되고 그가 유기된 자였다면 그의 재산을 빼앗으면서 지옥에까지 보내는 기만을 한 것이 된다. 자신이 상상한 신의 속성에 끼워 맞추기 위해 바울이 했던 주장 중 일부를 자신만의 기준으로 해석하여, 성경에 생생하게 기록된 주 예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은 정말로 신실한 태도일까?

 

하지만 나는 신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이중예정설을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다른 합리적인 아이디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이중예정설 특유의 폐쇄성에 대한 지적을 하고자 했을 뿐이다. 신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바란다면 유기된 사람에게도 마지막까지 구원의 기회를 한번 더 열어준다고 해석하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을까? 오후 늦게 고용되어 일을 시작한 포도원 품꾼에게도 넉넉한 품삯을 주는 것이 사랑의 흘러넘침이라는 신의 본질이듯이 말이다. 그 상황에서 한 사람의 자유의지로부터 도출된 진실된 회개와 이웃 사랑이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지를 선택할 최종적인 권리가 신에게 남아있다면 2차 은총으로 인해 신의 주권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오히려 그 선택은 신을 더욱 거룩한 존재로 만든다.

위에서 제시한 논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임의의 값을 동원한 예시로 설명해 보겠다.
신이 인간 중에서 60%는 구원하기로 예정하고 40%는 유기했다. 신은 어차피 구원받을 60%가 뭘 하는지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역설적이게도 신의 관심은 건강한 60%보다는 유기된 40%에게 더 크게 향한다. 이것이 바로 길 잃은 어린양을 끝까지 찾아오려는 목자의 마음이다. 신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병자들의 집단인 40%에게 회개하고 두드려서 문을 열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실제로 좁은 문으로 가기를 선택하고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30%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그 40%중 30%인 12%의 인간은 신의 2차 은총을 받게 된다. 패자부활전에서의 맹활약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는 셈이다. 이렇게 72%의 인간이 구원을 받고 28%의 인간이 유기된다. 이런 모델을 채택한다고 해서 신의 주권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는다.

 

이 모델이 지닌 힘은 구체적인 장면을 상상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40%에 속했지만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필사적인 회개와 순종으로 2차 은총을 받아 구원받은 사람(12%)이 천국에서 한 사람을 본다. 그는 지상에서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죄인이었지만, 신이 창세 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한 60%에 속해 있었다. 그 광경을 본 12%에 속한 사람이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가?"라고 경악할 때, 바로 그 지점에서 신의 절대적 주권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60%의 구원은 모든 것을 초월한 신의 '무조건적 선택'이며, 12%의 구원은 예수가 직접 해왔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응답하는 '추가적 은총'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구원은 여전히 신의 주권에 의한 것이면서도, 선함을 향한 인간의 절실한 회개와 신앙의 가치를 강조한 예수의 가르침 또한 온전히 보존된다. 이중예정설의 고질적 난제였던 자유의지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된다. 이런 절충안에서는 누구도 손해보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으면서 구원론의 성경 적합도는 오히려 향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행동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리로 반박하고자 하는 경직된 칼뱅주의자가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은 자기의 기존 주장을 관성적으로 고수하는 것이 목표인가요? 아니면 신의 절대적 주권을 지키는 게 목표인가요? 나의 논리는 신의 절대적 주권을 완전히 지켜내면서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으로 인해 발생한 팽팽한 논리적 긴장을 효과적으로 해소하고 있어요.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의 통일성 부족이라는 고질적 문제점들을 완화해 줬으니 오히려 반갑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