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능력이 모자란 유형의 위버멘시

누미 2025. 6. 17. 19:06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위버멘시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것이 지나치게 영웅 서사로 오독이 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약자인 사람에게도 위버멘시다운 면모가 있을 수 있을까라는 화두에 꽂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약간의 힌트가 생겼다. 그는 세상을 바꿀 능력이 없는 약자지만 자기의 세계에서만큼은 위버멘시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학습 목적의 우화를 만들어서 직관적으로 단순화시켜 정리해 봤다.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극단적 상황에 인물을 던져 넣는 사고실험이면서 이론에 대한 설명을 위한 기능적 캐릭터이기 때문에 인지왜곡이나 정신승리적인 요소는 없는 것으로 전제하겠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사건을 맞이하는 당사자의 정직한 내면인데 이 우화는 그 점에 중점을 둔 것이다. 남들이 아무리 정신승리라고 떠들거나 말거나 주인의 도덕을 추구하는 그의 영혼에는 아무런 상처나 영향을 줄 수가 없다.

지우은 겉보기에 초라한 남자다. 키는 155센티 정도에 체중은 50킬로 남짓 나간다. 그는 아직 위버멘시는 아니었지만 그런 삶의 자세를 추구했다. 그는 노예의 도덕이 아닌 주인의 도덕을 따른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한다. 그는 자작곡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지우는 길을 지나다가 갑자기 시상과 악상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 흥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디오니소스적으로 노래를 불러 재낀다. 프리스타일 즉흥곡이다. 그런데 더락 닮은 남자가 지우를 제지한다.
"이봐요. 공공장소에서 너무 시끄럽잖아요. 조용히 해요."

지우는 그 경고가 노예의 도덕이라 생각한다. 생면부지 타인에게 듣기 싫은 말을 하길 꺼리는 노예들을 대신해서(르상티망) 거구의 근육덩어리가 그들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한 것으로 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즐거운 창작 과정을 막을 수 없었다. 지우는 계속 노래를 불렀고, 몇 초 후에 발이 땅바닥에서 20센티 이상 떨어진 상태로 모든 체중이 옷깃에 의지하게 되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멱살을 잡힌 지우는 "이거 놔"라고 말했지만 더락남은 지우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지우는 땅바닥에 뒹굴었다. 온몸에 고통이 퍼지고 지우는 신음을 뱉었다. 지우는 잠시 후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더락 닮은 남자에게 "아프지만 짜릿한 비행이었어."(아모르파티)라고 말하고는 부르던 노래를 계속 이어가다가(영원회귀) 정신을 잃는다.
지우가 정신을 잃은 것을 보고 더락남은 자리를 피했다.

지우는 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그 자식이 내 멱살을 잡고 있는 동안 그놈 두 손은 날 들고 있었고 내 손은 자유로웠지. 손목을 꺾거나 오픈된 턱에 주먹을 날릴 수 있었는데... 힘을 앞세우며 내 의지를 꺾으려는 놈들로부터 내 예술활동을 보호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연마해야겠다.'
그러고는 지우는 펀치 연습과 손목 관절기 연습을 했고 펀치는 시원찮았지만 완벽한 손목 꺾기 기술을 마스터했다. 또한 기술이 먹히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낙법을 연습했다. (힘에의 의지)

얼마 지나서 지우는 던져졌던 그날의 녹음본을 들어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그 노래 말이야. 부를 때는 천상의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자아도취가 빠지고 지금 들어보니 형편없군. 이딴 노래면 맞을 만했어. 더 좋은 가사를 위해서 좋은 시들을 많이 읽어보고 작곡기법도 제대로 공부해 봐야겠어.' (자기 극복, 힘에의 의지)

지우는 더락 닮은 남자 같은 존재가 있든 말든 앞으로도 계속 내킬 때마다 길에서 즉흥곡을 부르겠다고 생각했다. 자기가 완벽하게 익혔다고 여긴 그 손목꺾기가 실전에서 먹히든 말든 상관없었다. (아모르파티, 영원 회귀)
새 노래들을 만들고 노래를 연습할수록 작곡실력과 가창력도 늘어서 사람들도 그가 노래할 때 속으로 '썩 잘하는 건 아니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그래도 제법 들을만한데'라고 생각한다. (자기 극복)

그러던 어느 날 존시나 닮은 남자가 즉흥곡을 노래하던 지우를 다시 막아섰다. 지우는 계속 노래했고 존시나 닮은 남자에 의해서 또다시 멱살을 잡혀 매달리게 되었다. 지우는 손목꺾기 기술을 넣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불필요하게 상황을 오래 끄는 것은 흥겨운 노래시간을 줄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예전처럼 다시 던져졌지만 완벽한 낙법으로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고 노래를 이어갔다.(자기 극복 + 아모르파티) 존시나 닮은 남자는 주먹을 쥐고 지우에게 다가왔다. 지우는 완력대 완력이라는 그 남자 중심의 규칙을 거부하기로 했다. 급히 자기 넥타이를 풀고 바닥에 있던 돌을 하나 얹어서 무릿매처럼 빙글빙글 돌리면서(자기 입법) 존시나 닮은 남자에게 말한다.
"알았어. 내가 졌어. 골리앗 아저씨. 그만하지."

표면적으로는 굴복이었지만 그 말에는 어떤 굴욕감도, 비굴함도 없다. 오직 '너와 엮이는 이 상황 자체가 지루하고 귀찮다'는 의사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경멸)
지우의 관심은 음악과 예술에서의 승리와 자기 극복이었을 뿐, 방해꾼과 무력으로 치고받는 것은 애초에 관심사 자체가 아니었다. 먹기 싫은 비곗덩이를 지나가던 개에게 던져주는 셈이다.
존시나 닮은 남자는 승리했지만, 전혀 통쾌하지 않다. 그는 방금 자신의 이마가 골리앗의 것처럼 박살 날 뻔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승리를 넘겨받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완벽하게 무시당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존재처럼 취급당했다는 기묘한 패배감을 느낀다. 그가 돌아서자마자, 지우는 방금 전의 소음 따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자신의 위대한 노래의 다음 소절을 다시 흥얼거리며 제 갈 길을 간다.(영원회귀, 자기 극복)

비록 지우는 객관적 차원에서는 아직은 소음 유발자에 불과할 수 있다. 다만 더 나은 모습으로 조금씩 발전해 나갈 뿐이다. 위버멘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쓰인 글이므로 아직 부족한 지우의 노래 실력이 과연 위버멘시적 창조성과 새로운 질서가 맞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변명을 해보겠다. 지우는 위버멘시는 강자(천재적 예술적 역량)만 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약한 인간(그저 그런 예술적 역량)을 대변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다. 지우가 육체적 강자였다면 덩치남들이 자기의 멱살을 잡았을 때 그들을 내동댕이 쳤을 것이다. 예술적 강자였다면 덩치남들은 지우를 방해하지 않고 경탄하며 박수를 보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전형적 위버멘시에 대한 이미지로는 이 글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약한 자의 위버멘시에 대한 모습을 전혀 보여줄 수가 없다. 세상의 규칙을 바꾸는 것은 위버멘시적인 삶에 대한 태도와 거대한 능력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자 부산물일 뿐 위버멘시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약자의 위버멘시는 어떻게 드러날까? 이 글에서는 인지왜곡과 정신승리는 없다는 전제조건을 내세워서 지우의 내면에 대한 진실성을 전지적 관점으로 보증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성이 없는 선언에 불과할 수 있다. 위버멘시를 추구하는 자가 아무리 스스로에게 정직하고자 해도 인간의 심리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자아를 보호하고자 한다. 또한 제삼자의 눈에는 위버멘시를 추구하는 약자는 아Q로 보이기가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위버멘시는 성취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를 설명하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의 능력을 요하는 강자의 전유물로 취급받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지우는 자신의 뜻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자기 극복, 영원회귀, 아모르파티, 힘에의 의지 등등 위버멘시적 모습을 보였다. 아Q가 인지왜곡을 일으킨다면 억지스러운 자기 합리화를 지우의 태도와 같다고 진심으로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Q는 현실의 장벽이 생기면 즉흥적인 핑계를 대며 우회하며 르상티망을 키워왔고, 여승처럼 자기보다 약한 존재 앞에서는 억눌린 원한을 파괴적이고 비루하게 분출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존시나 닮은 남자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아Q가 무릿매를 들고 있었다면 그는 그 돌로 상대의 이마를 박살냄으로서  커다란 근육남자에게 억눌렸던 원한을 해소하고픈 욕구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일로 감당해야 할 대가를 생각하면서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현실에서 둘을 외견상으로 구별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고래와 물고기가 다르듯 약한 위버멘시는 아Q와는 엄연히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다른 그 두 사람에게 큰 능력이 부여된다면 지우는 전형적인 위버멘시로 거듭날 것이다. 반면 아Q는 가장 교묘하게 진화한 마지막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