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니체의 필터로 바라본 악녀 이세벨

누미 2025. 6. 9. 14:54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가 얼마 전에 니체를 다뤘다. 집에 있던 자라투스트라를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던 기억이 있어서 나름 반가웠던 컨텐츠였다. 다 보고 나니까 니체가 말한 주인의 도덕에 충실한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건 바로 구약 최악의 빌런처럼 다뤄지는 왕비 이세벨이다. 그녀는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시다운 면모를 어느 정도 보여줬던 사람 같았다.

 

성경을 처음 읽을 당시, 나는 이세벨에게 덧씌워진 '음행의 상징'이라는 선입견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열왕기하 9장에서 그녀가 반역자 예후와 마주하기 직전 눈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질했다는 구절(30절)을 읽었을 때, 자연스럽게 '다 늙어서 반란군 수장에게 추한 아양이라도 떨려는 건가' 하고 예단하며 혐오스런 천박함을 느꼈다.

하지만 바로 다음 구절(31절)에서 이세벨은 소리 높여 예후를 모욕하고 저주하며 끝까지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고, 노예가 아닌 주인다운 최후를 맞이했다.(32절) 그 순간, 내 예상이 오히려 얼마나 저열했는지 깨달으며 잠시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음행'이라는 프레임이 씌운 선입견 때문에, 나는 그녀가 왕후로서 마지막 존엄을 지키기 위한 치장을 싸구려 유혹으로 오독했던 것이다. 나 같으면 빌면서 살려달라고 하거나 뭔가 흥정을 하려고 했을 것 같은데 이세벨의 영혼은 알량한 폭력으로는 꺾이지 않는 강인한 것이었다.


오히려 이세벨의 시신이 예후의 말에 밟히고 개가 뜯어먹었다는 기록이 오히려 성경 기자의 정신승리로 보였다. 니체의 렌즈를 빌리자면 강자를 제대로 정죄하지 못한 약자의 르상티망 같았다.
단지 엘리야의 예언을 사후적으로 실행한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예언이 아니라 협박이었던 셈이다.

말의 입장에서 물컹한 시신보다는 단단한 맨땅을 밟는 게 발에 편했을 텐데 굳이 왜 시신을 말이 밟았을까? 왕궁 옆에 왜 사람 잡아먹는 개들이 돌아다녔을까? 고기 수십 킬로를 뼈째로 먹어 치우려면 개, 아니 하이에나가 몇 마리나 필요했을까?
비록 말발굽에 밟히고 개에게 먹혔지만 이미 죽은 시신에 가한 그런 모욕이 신이 내린 징벌인지 여부도 애매하다. 영혼이 없는 빈껍데기를 훼손하는 건 야만인들에게 원초적 쾌감을 줄 수는 있겠지만 정작 심판당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가할 수 없다. 이세벨이 예상과 달리 끝까지 고고한 왕후로서의 품격을 지켜내자 그 시신이라도 욕보여서 기어코 그녀를 꺾고야 말았다고 선언하고 싶어 하는 노예들의 음침한 마음을 드러낸 것 같아 보였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이세벨이 개의 먹이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약자였던 엘리야가 현실에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강자였던 이세벨에서 퍼부었던 르상티망이자 프리스트적 복수로 보이게 되었다.

 

그때 이세벨을 만족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죄하지 못한 게 얼마나 분했으면 수백 년이 지나 요한계시록에까지 그녀를 소환했을까? 그것도 이세벨이 실제 저지르지도 않았던 '음행의 상징'이라는, 가장 모욕적인 역할을 부여하면서 말이다. 이 프레임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수천 년 후의 독자인 나조차도 앞에서 언급했듯 그녀의 마지막 존엄한 치장을 '추한 아양'으로 오해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세벨의 진짜 악행이라 봐야 종교 탄압(나봇의 포도원 사건 포함)이 전부였는데, 그녀를 향한 모욕과 비하는 참으로 더럽고 끈질겼다.


이세벨의 최악의 악행이라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가장 먼저 느꼈던 건, 고대 전제 왕국의 왕비와 왕후로 수십 년을 살았던 사람의 평생을 탈탈 털어서 나온 잘못 중에서 가장 큰 것이 그 정도라면, 구약 최악의 빌런 치고는 다소 초라한 행적 아닌가라는 의구심이었다. 그녀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싶었던 성경의 기자라면 그녀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조목조목 고발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딱히 구체적인 악행 사례는 제시되어있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기자들은 집계할 수 있는 사상자 수를 비교적 누락 없이 기록하는 경향이 있다. 이세벨이 야훼 신앙을 탄압하고 예언자들을 죽였다지만(열왕기상 18장 4절) 구체적으로 누구를 해쳤는지 몇 명을 죽였는지는 성경에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는다. 오히려 야훼 신앙을 수호하는 엘리야가 바알을 숭배하는 이세벨 측 종교인들을 450명이나 죽인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세벨은 촌구석 이스라엘에 비해서는 선진 문명이었던 시돈에서 성장한 공주였다. 그곳에서는 왕이 달라면 줘야 하는 게 법이었을 것이다. 남편 아합은 순진한 건지 착한 건지, 충분한 대가를 준다고 했는데도 포도원을 넘기지 않는 건방진 농부 나봇에게 쩔쩔매다가 건강을 해칠 지경이 되었다. 이세벨은 남편을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도 그런 일이 있으면 관공서 부지라면서 공용수용을 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용수용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것 같다. 단순무식한 방법을 생각하자면 그냥 나봇을 꽁꽁 묶어서 더 좋은 새 포도원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나봇이 포박을 풀고 돌아오는 동안에 아합이 원했던 땅에 있던 포도나무를 싹 밀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그랬다면 그 옹고집 나봇이 돌아오더라도 왕궁 앞에서 몇 번 징징대다가 지치기도 하고 딱히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음을 받아들이고 새로 교환받은 포도원으로 돌아가서 포도 농사나 계속 지었을 것 같다. 아합의 말대로 실제로 더 좋은 포도원이라서 막상 소출이 원래 땅보다 더 많으면 은근히 마음 속으로는 기뻐하기도 했을 수 있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다.

하지만 이세벨은 그것보다도 더 비열한 방법을 썼다. 무고한 나봇을 모함하여 살해한 것이다. 그게 아마도 그녀에게는 주인의 도덕이었을 것 같다. 그 포도밭을 얻기 위해서 아합이 지불하려던 땅값도 쓰지 않았다. 강자인 주인답게 누구의 눈치도 부지 않고 모든 문제를 간단하게 걸림 없이 해결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주인이더라도 일부러 노예들의 불필요한 르상티망을 키우는 것은 딱히 현명한 선택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하고 싶은대로 저지르는 주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보다 교묘한 방법을 사용하는 주인의 미덕을 굳이 피할 필요도 없었다. 

이세벨이 자기의 아세라 바알 신앙에만 얽매이지 말고 적의 칼로 적을 베는 연습을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내가 그의 측근이었다면 이런 조언을 했을 것이다.


사무엘기하에서 전염병이 돌자 다윗이 아라우나로부터 타작마당을 사서 제단을 세웠다. 일종의 공용수용이었다. 공공의 필요에 의한 토지거래가 가능하다는 선례다.
가장 가까이는 이세벨의 시아버지이자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왕이 사마리아산을 사서 성읍을 건축하고 수도로 삼았던 사례도 있다.

레위기에는 팔린 땅의 소유권이 50년 후에 원래 주인에게 되돌아간다는 희년제도가 있다. 그런 규정 자체가 토지의 거래를 전제한 것이다. 그렇게 율법 대 율법 구도를 만들고 거기에 왕권을 살짝 올려보는 것이다. 나봇에게는 50년 후에 돌려준다고 하면서 일단 포도원을 산다. 그리고 50년이 지나면 이세벨도 아합도 나봇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막상 50년 후, 나봇의 후손 입장에서는 아합으로부터 보상받은 새 포도원이 조상으로부터 받은 땅이자 자신들이 나고 자란 터전이라 굳이 무리해서 다시 바꾸자고 할 이유도 없다.

또 다른 방향의 접근도 가능하다. 다윗이 타작마당에 세웠던 그 제단 부지에는 이후 솔로몬의 성전이 들어서서 50년 후 돌려주는 희년 규정 적용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아합도 포도원을 일단 확보하고 나서 거기에 뭔가 세워버리면 솔로몬의 성전 부지를 아라우나의 후손들에게 돌려주지 못하게 된 것처럼 그 땅을 영구적으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런 식으로 이세벨이 율법으로 율법을 농락하는 판도를 창조해 내면서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같은 즐거움을 느꼈다면 '위버멘시 지수'는 현재보다 상당히 올라갔을 것이다.

이세벨이라는 인물은 신앙인 입장에서는 우상숭배를 하고 야훼 신앙을 탄압한 희대의 악녀이자 르상티망의 대상이었지만, 수천 년이 지나 '옛날 이야기'로만 읽는 제삼자 입장에서는 주인의 도덕을 실행하며 이야기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매력적인 빌런으로 재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