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에 대한 라이트한 수준의 탐구
석가모니는 열반 후의 일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물어봐도 독화살의 비유만 이야기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단지 호기심만 가지고서 열반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에 대해 생각해 봤다. 오온의 작용에 대한 설명을 하기에는 유식 이론을 가져오는 게 편하다.
어떤 사람이 깨달음을 얻고 해탈을 해서 모든 업이 소멸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오온이 곧바로 흩어지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하여 열반하면 그때부터 그의 오온은 흩어지고 소멸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나식이 아뢰야식에 집착하여 그것을 자아라고 착각하고 새로운 종자를 꺼내서 오온을 다시 형성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업이 모두 소멸되어서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없다. 즉 새로운 오온을 형성할 재료가 없다. 말나식 역시 무아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어서 새로운 오온을 만들 동력이 없다. 7식과 8식은 아트만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소멸한다.
윤회란 업의 승계인데 남은 업보도 없고 오온도 소멸했으니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게 내가 열반 이후에 발생할 프로세스에 대해 논리적으로 추론한 내용이다.
이런 추론은 얼핏 석가모니가 경계했던 단멸론을 연상시킬 수 있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단멸론이란 "죽으면 그만"이라는 철저하게 현상적으로만 접근한 극단적인 논리이다. 단멸론은 업의 승계 같은 현상 너머의 근원적인 원리를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죽으면 끝이라는 단멸론과 소멸하지 않는 영원한 아트만이 있다는 상주론 같은 각각 극단적 존재론에서 중도의 길을 채택한 것이 무아론과 열반이다. 이것을 공 사상의 관점으로 다시 해석하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허상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나로서는 나름 독자적으로 파고 들어서 도착한 지점이지만, 따지고 보면 누구나 생각해볼만한 주제라서 이미 옛사람들이 치열하게 토론했던 주제라고 한다. 그래서 지혜를 뜻하는 무루종자는 소멸되지 않고 흔히들 업보라고 칭하는 유루종자만 소멸된다든지, 무루, 유루 뭐든 다 소멸된다든지 등의 문제로 종단별 입장 차이가 있다는 해설도 접할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연구한 분야이라서 파고들수록 앞서 살펴본 유루, 무루 외에도 법상, 대원경지, 공중지공 등등 생소하고 마니악한 불교 용어들이 다양하게 등장해서 "그게 뭔데? 씹덕아" 같은 상황에 몰리게 된다. 지적인 탐구는 파고들고 싶은 지점까지에서 멈춰야 앞으로도 흥미를 유지할 수 있으므로 오늘은 여기에서 중단하는 게 좋겠다. 부처님이 괜히 침묵하신 게 아닌 것 같다. 몰라도 수행해서 해탈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 보인다. 반면에 제대로 빠져들고 명확하게 답이 안 나오는 지식에 집착하면 수행과 해탈은 어려워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