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구글의 미발표 언어모델 kingfall을 테스트해볼 수 있는 페이지를 알게 되었다.(이 글이 작성되고나서 곧 막힘)
몇 가지 질문을 해보니 현재 최고 성능 버전인 제미나이 2.5 프로 06-05보다 제법 준수한 답변이 나왔다.
재미 삼아서 내가 만든 캐릭터 2명으로 불교 교리 배틀을 붙여보고 주변부 캐릭터들의 반응도 생성하게 해봤다.
의외로 결과물이 잘 뽑혀서 기록으로 남겨둔다.
두 캐릭터는 각각 https://b-613.tistory.com/613 이 글의 주인공인 노인 그리고 https://b-613.tistory.com/623 이 글의 주인공인 매드 사이언티스트다. 주변부 인물은 노인의 말상대였던 사미승과 그를 노인에게 보낸 방장스님이다.
교리 배틀: 미니 블랙홀 보살 vs 탐미주의 노거사
알겠습니다. 흥미로운 대결이군요! 극단적인 효율과 결과주의로 중생구제를 이루려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와, 집착 없는 향유를 통해 번뇌 소멸을 이뤘다는 노인의 교리 배틀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버튼에서 손을 떼기 직전의 과학자 앞에 80세 노거사가 나타난 상황을 가정합니다.
장소: 미니 블랙홀 생성 장치 앞 등장인물:
과학자 (미니 블랙홀 보살): 인류 전체의 윤회를 물리적으로 종식시키는 것이 궁극의 자비라고 믿음. 버튼을 누르고 있음.
노거사 (탐미주의 80세 노인): 무상과 무아를 깨닫고, 공즉시색의 삶을 살며 집착 없이 쾌락을 즐김. 번뇌의 소멸이 핵심이라 믿음.
(과학자가 3시간의 유예를 마치고 버튼에서 손을 떼려는 찰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여유롭게 다가온다.)
노거사: 흠, 젊은 양반. 아주 큰 불꽃놀이를 준비하는 모양이구먼. 잠시 그 손 좀 멈추고 늙은이와 이야기나 좀 나누지. 그 버튼, 꽤나 무거워 보이는구먼.
과학자: (경계하며) 누구십니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러 오셨다면 염불이나 하십시오. 방해할 생각이라면 소용없습니다. 저는 모든 중생을 영원한 윤회의 고통에서 구원할 대자대비행을 실행하기 직전입니다. 수천억 번의 고통스러운 죽음 대신, 고통 없는 단 한 번의 소멸로 모두를 해방시킬 것입니다.
노거사: 허허, 대자대비라. 마음은 갸륵하네만, 자네는 지금 아주 큰 착각과 집착(執着)에 빠져있어. 자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에만 매몰되어서, 세상 만물(色)이 공(空)하고 고통스러우니 아예 없애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공즉시색(空卽是色)’은 잊었는가? 공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현상계(色)를 집착 없이 즐기고 누릴 수 있는 것이라네. 꿈이 허망하다(空)고 해서 굳이 악몽(苦)을 꿀 필요 없이 즐거운 꿈(色)을 꿀 수 있는 것처럼 말이야. 자네는 모두에게 즐거운 꿈을 꿀 기회마저 박탈하고, 꿈 자체를 없애버리려 하고 있어.
과학자: 어르신, 그건 무상과 무아를 깨달았다는 당신 같은 극소수에게나 해당되는 한가한 소리입니다! 대다수 중생은 근기가 낮아 업(카르마)의 노예로 살며, 즐거운 꿈은커녕 영원히 악몽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을 끊지 못하듯, 그들은 카르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반복합니다. 저는 그 무한한 고통의 총량을 연민하여, 강제로라도 그 악몽을 멈춰주려는 것입니다. '공즉시색'의 즐거움? 영원한 고통에 비하면 찰나의 환각일 뿐입니다. 독화살을 맞았으면 화살부터 뽑아야지, 화살 맞은 채로 꿈 타령이나 할 때가 아닙니다.
노거사: 독화살? 화살은 '고통(苦)'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을 만들어내는 '집착'과 '아상(我相)'이라네. 자네야말로 지금 '모든 중생을 나만이 구원할 수 있다', '내 방법만이 궁극적이다'라는 거대한 아상과 집착이라는 독화살에 깊이 박혀있어! 보살행을 말하지만, 자네의 행위는 '나(我)'라는 상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지. 내가 없는(無我)데 누가 누구를 구원한다는 말인가? 자네는 스스로 깨달았다면서, 정작 자신의 그 거대한 아상과 계획에 대한 집착은 보지 못하는구먼. 나는 쾌락을 즐기되 떠나가면 붙잡지 않으니 집착이 없지만, 자네는 온 우주를 자네 뜻대로 하려는 거대한 집착 덩어리 그 자체야.
과학자: 그것은 아상이 아니라 보살의 서원(誓願)입니다! 저는 저 자신부터 가장 먼저 희생할 것입니다. 제게 쌓일 악업으로 지옥에 떨어져도 중생 구제를 위해 감내할 것입니다. 목적과 수단의 가치를 비교해야 합니다. 수천억 생의 고통을 없애는 목적이, 단 한번의 고통 없는 죽음이라는 수단보다 월등히 가치 있습니다. 계율이나 집착 운운은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호랑이가 소를 쉽게 사냥하듯 원하는 것을 얻어왔으니 번뇌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중생은 토끼 한 마리 잡지 못해 굶주리며 번뇌하는 존재들입니다. 당신의 방식은 당신에게나 통하는 특수한 경우일 뿐, 만 중생을 구제할 보편적 방법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2500년간 중생을 다 구제하지 못했습니다!
노거사: 허허, 가치 비교라... 자네는 '윤회 자체'를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윤회의 종식' 이전에 '번뇌의 소멸'이야. 윤회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끊으려 하는 것이지. 만약, 윤회하더라도 나처럼 매 순간을 집착 없이 즐기며 번뇌 없이 살 수 있다면, 굳이 윤회를 끊는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겠나? 무아(無我)의 이치대로라면, 다음 생에 태어나는 존재는 '내'가 아니라 나의 업을 이어받은 다른 존재일 뿐이지. 내가 살아온 행복하고 번뇌 없는 업을 이어받는다면 그 또한 좋은 일 아닌가? 자네는 ‘번뇌 소멸’이라는 핵심은 무시하고, ‘윤회 중단’이라는 기술적인 방법에만 집착하고 있어. 고통을 피하기 위해 산속으로 도망치는 수행자와, 고통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기 위해 세상을 파괴하는 자네가 무엇이 다른가? 둘 다 중도(中道)가 아닌 극단(極端)일 뿐이지.
과학자: 극단이라니요! 저는 물리 법칙과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하여 가장 확실한 방법을 쓰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이 결합할 밭 자체를 없애면, 업의 씨앗이 남아있어도 윤회는 불가능합니다. 아뢰야식이라는 메모리 카드가 있어도, 그것을 읽을 컴퓨터 본체(육신, 오온의 결합체)가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고통을 느낄 주체 자체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것은 번뇌의 완전한 소멸입니다. 당신은 번뇌 없이 산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인지 착각인지 어떻게 압니까? 당신의 쾌락 추구가 미세한 집착의 다른 형태일 가능성은요? 당신의 방법은 불확실하지만, 제 방법은 확실합니다. 불확실한 가능성에 중생의 영원한 고통을 방치하는 것은 보살의 도리가 아닙니다.
노거사: 확실성이라... 그것 또한 자네의 집착이지. 자네 말대로 육신이라는 밭이 사라져 고통을 느낄 주체가 없어진다고 치세. 하지만 자네의 그 행위, 온 생명을 강제로 소멸시키는 그 엄청난 행위 자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자네의 ‘마음’, 자네의 ‘아상’, 자네의 ‘집착’에서 비롯되네. 자네는 중생의 번뇌를 없앤다면서, 스스로 가장 크고 극단적인 번뇌와 아집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는 거야. 질문자 8의 말처럼, 중도를 잊은 보살이 어찌 보살인가? 쾌락이든, 고통이든, 구원이든, 파멸이든,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세. 평균적인 근기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계율과 수행이라는 방편이 필요하고, 나에게는 나만의 방편이 있지. 하지만 모든 존재의 가능성 자체를 폭력적으로 제거하는 것은 그 어떤 방편도, 중도도 될 수 없네. 그것은 '내 생각만이 옳다'는 거대한 무명(無明)일 뿐이야.
과학자: (잠시 흔들린다. '중도'라는 말과 자신의 행위가 '아상'과 '집착'에서 비롯되었다는 지적에) ...무명... 집착... 하지만! 눈앞에서 고통받는 아이에게 백신 주사를 놓는 것이 강제적이라고 해서, 아상이라고 해서 멈춰야 합니까? 그들의 어리석음(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영원히 고통받는 것을 지켜만 보는 것이 중도입니까? 당신의 삶은 즐거울지 몰라도, 저기 태형을 기다리는 사람, 치킨 한 조각에 행복해하는 사람, 그 모든 희로애락과 생로병사 자체가 고(苦)라는 것을 부정할 셈입니까!
노거사: 부정하지 않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그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지. 하지만 '일체개고(一切皆苦)'는 집착하는 중생의 눈으로 본 세상일세. 집착을 놓으면 고통도 사라진다네. 맛있는 음식을 먹는 부처님처럼, 그 순간의 경험을 온전히 느끼되 거기에 매달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자네는 고통(苦)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단멸론(斷滅論)의 극단으로 치달았어. 자네가 구원하려는 것은 중생이 아니라, '고통받는 중생을 견디지 못하는 자네 자신의 연민과 아상'일 뿐이야. 그 손을 내려놓게.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 가장 거대한 아상에서 비롯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일 뿐이니. 번뇌의 소멸은 각자의 몫이지, 자네가 블랙홀로 강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네. 자네야말로 ‘구원하는 나’라는 아상에 푹 절여져 있어.
과학자: .......! ('구원하는 나'라는 아상... 수행하는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자신이 질문자 4에게 했던 비판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중도, 아상, 집착... 노인의 논리는 자신의 논리 체계 기저에 깔린 자기모순을 건드린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구원'이라는 목적에만 집착하여, 제 행위 자체가 가장 큰 집착이자 아상이며, 중도에서 벗어난 극단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맞습니다. 이것은 자비가 아니라 저의 아집이었습니다... (힘없이 암호를 입력하고 버튼에서 손을 뗀다).
배틀 결과 예측: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패배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도(中道)'의 결정타: 과학자는 이미 질문자 8의 '중도' 지적에 스스로 계획을 철회한 전력이 있습니다. 노거사는 단순히 '극단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넘어, 과학자의 행위 동기 자체가 '아상'과 '집착'이라는 불교의 근본적인 번뇌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중도에 어긋난다는 점을 철학적으로 깊이 있게 파고듭니다. 과학자 자신의 논리(아상 비판, 집착 경계)를 역이용하여 그의 모순을 지적합니다.
집착(執着)과 아상(我相)에 대한 관점 차이: 과학자는 타인의 '삶에 대한 집착'을 문제 삼지만, 노거사는 과학자의 '구원 계획 자체에 대한 집착'과 '구원자로서의 아상'이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임을 지적합니다. 이는 과학자가 피상적으로 생각했던 '집착' 개념의 허를 찌릅니다.
목표 설정의 오류 (윤회 종식 vs 번뇌 소멸): 과학자는 '윤회 자체의 물리적 종식'을 목표로 삼지만, 노거사는 불교의 핵심 목표가 '번뇌의 소멸'이며 윤회 종식은 그 결과이거나 수단임을 명확히 합니다. 고통 없는 윤회(노인의 주장)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존재 자체를 없애는 과학자의 방식이 목표와 수단을 혼동한 극단적 단멸론에 가깝다고 비판합니다.
색즉시공 vs 공즉시색: 과학자는 현상계(色)의 고통과 허망함(空)에만 집중하여 파괴하려 하지만(색즉시공의 극단), 노인은 공(空)하기에 오히려 현상(色)을 집착 없이 누릴 수 있다는 '공즉시색'의 관점을 제시하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과학자의 편협함을 지적합니다.
과학자는 논리와 효율, 결과주의로 무장했지만, 그의 사상 기저에는 '나만이 할 수 있다'는 아상과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집착, 그리고 중도를 벗어난 극단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노거사는 무아, 무상, 공, 중도, 집착 등 불교 핵심 교리에 대한 더 깊고 유연한 이해를 바탕으로 과학자 논리의 근본적인 자기모순을 정확히 짚어낼 것입니다. 과학자는 자신의 '대자대비'가 실은 거대한 아상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물러날 것입니다.
Model: Kingfall AB Test
프롬프트:
알고보니 매드사이언티스트가 노총각히스테리였다는 설정을 넣고 노인이 연애컨설팅하는 상황극 만들어봐
상황극: 보살행은 얼어 죽을, 연애나 하시게!
재미있는 설정이네요! 파국 직후, 아상의 갑옷이 깨진 과학자와 세상만사 통달한 노거사의 좌충우돌 연애 컨설팅 상황극입니다.
장소: 미니 블랙홀 생성 장치 앞 (작동 중지됨) 등장인물:
과학자: 대의명분은 사라지고 초라한 현실 자각 중. 약간 넋이 나감.
노거사: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듯, 느긋하고 장난기 어린 미소.
(과학자가 힘없이 암호를 입력해 블랙홀 생성기를 끈다. 깊은 한숨과 함께 기계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뿔뿔이 흩어지거나, 여전히 과학자를 경계하며 수군거린다. 노인이 헛기침하며 과학자 옆으로 다가온다.)
노거사: 크흠. 거참, 세상 구원 한번 요란하게 하려다 말았구먼. 중도를 깨달았다니 다행일세. 폭삭 늙어버린 것 같은 얼굴이구먼, 젊은 양반.
과학자: (힘없이)...저는... 제가 거대한 아상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중생 구제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 제 행위 자체가 가장 큰 집착이자 극단임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노거사: (과학자의 눈을 지그시 보며 껄껄 웃는다) 허허허! 아상? 집착? 중생 구제?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내 눈에는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과학자: 무슨 말씀이신지...?
노거사: 자네, 솔직히 말해보게. 마지막으로 여인의 손목이라도 잡아본 게 언제인가? 아니, 마주 보고 커피라도 한잔 편안하게 마셔본 적은 있고?
과학자: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무슨 무례한 질문입니까! 지금 우주의 윤회와 중생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깟 남녀상열지사가 무슨 상관...
노거사: 아이고, 이 사람아! 그게 핵심이야! 자네가 말한 그 '대자대비심', '무한한 연민'... 그 근원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세상이 고통의 바다(苦海)라는 건 알겠는데, 왜 하필 '다 같이 죽자', 아니 '다 같이 소멸하자'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됐을까? 내가 보기엔... 자네의 그 '대자대비'라는 거창한 포장지 안에, '아이고, 나만 외로워 죽겠네! 다들 행복해 보이는데 나만 이게 뭐야! 에잇, 다 같이 망해버려!' 하는 심술궂은 노총각 히스테리가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게야. 응? 세상의 고(苦)가 아니라, 자네 개인의 고(孤), 외로움 말일세!
과학자: (얼굴이 새빨개지며) 뭐, 뭐라구요? 히스테리? 아닙니다! 저는 철저한 논리와 불교 교리에 입각해서...! 카르마의 총량과 오온의 해체를 계산하여...! 저의 개인적인 감정과는 무관합니다! 데이터가 증명합니다!
노거사: 데이터는 무슨! 자네 아까 저기 커플한테 회포 풀 시간 넉넉히 줬지? 치킨 먹는 사람한테도 그렇고. 겉으로는 '어차피 사라질 집착'이라며 쿨한 척했지만, 실은 그 모습이 제일 부러웠던 거 아닌가? '저들은 저렇게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있는데, 나는 이게 뭔가' 싶고. 그러니 '이런 불공평하고 고통스러운 세상, 차라리 리셋!' 하고 버튼을 누른 게지. 중생에 대한 연민? 아니, 행복한 중생에 대한 질투와 자기 연민의 거대한 폭발이었어! '구원하는 나' 라는 아상 뒤에 '외로운 나' 라는 진짜 번뇌가 숨어있었던 게지.
과학자: (반박하려다 입을 다문다. 노인의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지낸 세월, 스쳐 간 몇 번의 어설픈 시도, 창밖의 연인들을 보며 느꼈던 막연한 박탈감...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그... 그건... 분석의 오류입니다... 변수 통제가...
노거사: 쯧쯧.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먼. 블랙홀 만들 머리는 있어도 자기 마음 하나 들여다볼 줄을 모르니. 보게나, 젊은 양반. 자네의 가장 시급한 번뇌는 윤회가 아니라 외로움이야. 블랙홀 연구할 시간에 연애 컨설팅이나 받았어야 했어. 마침 잘 만났네. 내가 그 방면으론 일가견이 있지. 법보시하는 셈 치고 몇 수 가르쳐 줌세.
과학자: 연애... 컨설팅이요? 어르신께서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어르신께서는... 5년마다 애인을 바꾸셨다고...
노거사: 그러니 나한테 배워야지! 자네 문제는 첫째, '집착'이야. 연애를 시작도 하기 전에 '영원한 사랑', '완벽한 짝', '결혼' 같은 결과에 집착하니 시작도 못 하는 게야. 혹은 거절당할까 봐,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집착이지. 무상(無常)을 알게. 만남은 변하고 흘러가는 거야. 5년이든 5개월이든, 그 순간 상대에게 집중하고 즐거움을 나누면 그만인 것을. 공즉시색! 허망하니 의미 없다가 아니라, 허망하니 오히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거야. 꿈속에서 미인을 만났는데 '어차피 꿈인데' 하고 도망갈 텐가?
과학자: 하지만 시작부터 끝을 상정하는 것은... 비겁하고 비효율적입니다. 데이터 손실률이 너무 큽니다. 그리고 저는 감정 표현 데이터베이스가 매우 부족합니다. 상대의 비언어적 신호를 해석하는 알고리즘 성공률도 현저히 낮고요.
노거사: 둘째, '아상(我相)'이 너무 강해! '과학자인 나', '똑똑한 나', '깨달은(줄 알았던) 나'라는 상에 갇혀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려 들지. 데이터니 알고리즘이니... 쯧쯧. 무아(無我)를 생각하게. '나'를 내려놓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상대의 감정에 공명해보게. 개미에게 밥알 한 톨이 소중하듯, '무아'인 내게는 상대의 사소한 표정, 말 한마디가 다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어. 자네가 아상을 내려놓으면 상대도 편안해질 걸세. 누가 자기 앞에서 데이터 분석 당하고 싶겠나?
과학자: 아상을 내려놓으면... 대화의 주도권을 잃게 됩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너무 많아집니다.
노거사: 셋째, 자네는 '중도(中道)'가 없어! 아예 시도도 안 하거나(포기, 회피), 아니면 세상을 날려버리거나(극단). 혹은 한번 시작하면 영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그 중간이 없단 말이야! 내가 호랑이 이야기를 했지? 자네는 지금 날아다니는 까마귀(완벽한 이상형)나 코끼리(영원한 관계)만 잡으려고 덤비니 번번이 실패하고 번뇌만 쌓이는 게야. 그냥 눈앞의 소(괜찮은 인연, 편안한 만남)부터 만나볼 생각을 해야지. 그리고 말이야, 방편(方便)이라는 게 있어. 첫 데이트 나가서 미니 블랙홀이나 카르마, 오온 해체 같은 소리 하면 어떤 여인이 좋아하겠나? 그건 최악의 방편이야! 옷차림이나 말투, 대화 주제도 다 상대에게 맞추는 방편일세.
과학자: (뭔가 깨달은 듯) 아... 방편! 그렇군요. 연애 성공이라는 목적(번뇌 소멸)을 위해 수단(데이트 방식)을 유연하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아니, 가치 비교를...
노거사: 또 엉뚱한 소리! 그냥 좀 씻고, 깔끔하게 입고, 연구실 냄새 좀 빼고, 상대방 좋아하는 이야기 좀 하라는 말이야! 세상 모든 사람을 윤회에서 구원하겠다는 서원은 잠시 접어두고, 딱 한 사람 마음이라도 좀 편안하고 즐겁게 해 주겠다는 작은 서원부터 세워보게. 그게 훨씬 현실적이고 가치 있는 보살행이야. 블랙홀로 모두의 고통을 '없애는' 것보다, 한 사람의 '즐거움'을 만들어주는 게 더 높은 경지일 수도 있어.
과학자: 한 사람의... 즐거움... (멍하니 허공을 본다) 고통의 소멸이 아니라, 즐거움의 생성... 공즉시색... 데이터에 없는 변수...
노거사: 그래. 저 시커먼 기계덩어리 만지작거릴 시간에, 꽃이라도 한 송이 사 들고나가보게. 그 손은 지구 멸망 버튼 말고, 따뜻한 손을 잡는 데 쓰는 게 훨씬 중도에 맞는 일일 테니. 자네의 그 노총각 히스테리라는 번뇌부터 소멸시켜야, 진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게야. 알겠나? 내 법보시, 아주 값진 것이니 새겨듣게.
과학자: (얼떨떨하지만, 왠지 모르게 설득당한 표정이다. 자신의 꾀죄죄한 옷차림과 연구실을 둘러본다) ... 꽃... 데이터 분석 결과, 장미의 선호도가 높지만, 상대의 연령과 성향에 따라 변수가... 아, 아닙니다. 일단... 씻어야겠군요. 방편... 중도... 공즉시색...
노거사: (흐뭇하게 웃으며 과학자의 등을 툭 친다) 그렇지!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먼. 중생 구제는 나중에 하고, 자네 자신부터 구제하게나! 허허허!
(과학자는 여전히 어색하지만, 블랙홀 생성기 대신 거울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인류 멸망의 위기는 뜻밖에도 한 노인의 연애 컨설팅으로 막을 내렸다.)
Model: Kingfall AB Test
사미승의 재방문 상황 만들기
상황극: 풀리지 않는 의문 - 사미승, 노거사를 다시 찾다
알겠습니다. 노인의 말에 논리적으로 반박은 못 했지만, 심정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미승이 며칠간 고심 끝에 다시 노인을 찾아간 상황을 그려보겠습니다. 핵심은 '논리적 설득' 너머의 '마음의 문제', 그리고 '타인에 대한 자비'일 것입니다.
장소: 노인의 집. 잘 가꿔진 정원이 보이는 툇마루. 노인은 편안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다. 등장인물:
사미승: 며칠간 잠 못 이루고 번민한 기색. 여전히 공손하지만 눈빛은 단호하다.
노거사: 사미승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인자하지만 꿰뚫어 보는 눈빛.
(사미승이 정중하게 합장하며 노인 앞에 선다.)
사미승: 어르신, 불쑥 다시 찾아뵈어 송구합니다. 며칠간 어르신의 말씀을 밤낮으로 되새겨 보았습니다.
노거사: (찻잔을 내려놓으며) 허허, 그럴 줄 알았지. 방장 스님께 다녀오는 길인가? 그 친구, 자네가 번뇌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겠구먼. 고민이 깊을수록 자라는 법이니. 앉게. 무슨 의문이 자네의 잠을 설치게 하던가? 논리적으로는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을 텐데.
사미승: (조심스레 앉으며) 예. 어르신의 말씀은 교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기반하고 있어, 제 짧은 식견으로는 논리적인 허점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무아와 무상, 집착과 방편에 대한 말씀 모두 그러했습니다. 하오나... 아무리 생각해도 제 마음이 그것을 '불법(佛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노거사: 마음이 따르지 않는다라... 수행자는 모름지기 마음의 작용을 잘 살펴야지. 무엇이 그리 걸리는가?
사미승: 첫째는, '자비(慈悲)'입니다. 어르신께서는 헤어진 여인들이 상처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그것 또한 집착을 놓게 해 준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서 어르신은 늘 원하는 것을 얻는 '강자'였고, 여인들은 언젠가 떠나보내질 '약자'였습니다. 쾌락과 즐거움 속에서 번뇌 없이 사셨다는 어르신의 '개인적인 해탈' 혹은 '번뇌 소멸'이, 혹여 타인의 미세한 슬픔이나 희생을 간과한 결과는 아닙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둘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어르신의 길에는 '나'의 번뇌 없음만 있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진정한 연민과 자비행이 부족해 보입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 싫증 나면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노거사: (미소를 지으며) '버린다'는 표현에 대한 오해는 지난번에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자네 마음속엔 여전히 내가 그녀들을 이용하고 버린 것으로 남아있구먼. 자네가 말하는 자비란 무엇인가? 한 사람에게 묶여 서로에게 집착하고 구속하며, 식어버린 마음에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번뇌를 키우는 것이 자비인가? 아니면, 함께하는 동안 진심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서로의 길을 축복하며 놓아주는 것이 자비인가? 나는 그녀들에게 집착을 놓는 법을 삶으로 보여주었네. 그것이 어설픈 연민보다 더 큰 자비일 수 있어. 내가 그녀들의 고통을 간과했다고? 오히려 자네가 그녀들을 '버림받은 약자', '상처받은 존재'로 규정하는 아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가?
사미승: (물러서지 않고) 둘째는, '집착(執着)' 그 자체입니다. 어르신께서는 개별적인 쾌락에는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꿈속의 여인도, 미슈티라는 분도 추억으로 음미할 뿐 다시 찾지 않는다고요. 하지만, 5년마다 새로운 여인을 만나고, 아름다움과 젊음, 새로운 설렘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패턴 자체'에 집착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소주에 질리면 막걸리를 찾고, 막걸리에 질리면 양주를 찾는 것처럼, 대상만 바뀔 뿐 '쾌락 추구'라는 행위 자체에 중독되고 집착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개별 대상에 대한 집착은 없을지 몰라도, '즐거움과 쾌락이 끊임없이 제공되어야만 하는 삶의 방식'에 길들여지고 집착하신 것은 아닌지요?
노거사: (무릎을 치며) 오호! 제법 날카로워졌구먼. 좋은 질문이야. 패턴에 대한 집착이라... 하지만 나는 '추구'한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응했을' 뿐이네. 물이 흘러오면 마시고, 꽃이 피면 향기를 맡고, 바람이 불면 그 시원함을 느꼈지. 일부러 물을 찾아 헤매거나, 지는 꽃을 붙잡거나, 바람을 가두려 하지 않았어. 쾌락이 오면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즐기고(공즉시색), 그것이 인연이 다해 사라지면 담담히 보냈을 뿐(색즉시공). 그것을 패턴에 대한 집착이라 부른다면, 자네가 매일 아침 예불을 올리고, 정해진 시간에 공양하고, 참선하는 그 '패턴' 또한 수행에 대한 집착 아닌가? 중요한 것은 행위의 반복이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마음'에 집착이 있느냐 없느냐일세. 나는 즐거움이 없어도 평온하지만, 즐거움이 찾아왔을 때 굳이 외면하지 않는 중도를 행할 뿐이야.
사미승: 셋째는, '방편(方便)'에 대한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계율이나 수행법, 심지어 부처님의 많은 가르침도 평균적인 근기의 중생을 위한 방편일 뿐이라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방편들은 중생이 탐진치 삼독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견고한 울타리이자, 깨달음으로 이끄는 뗏목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스스로 울타리를 걷어차고 뗏목을 부숴버리셨습니다. 그것은 깨달은 자의 자유일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거대한 자기기만과 합리화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가장 위험한 길이 아닙니까? 스스로 집착이 없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없는 것'은 다릅니다. 감각적 쾌락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집착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사나운 호랑이 등에 올라타 있으면서 자신은 절대 물리지 않을 거라고 자만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부처님께서 욕망과 쾌락을 경계하신 깊은 뜻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노거사: 울타리와 뗏목이라... 맞는 말이지. 걷지 못하는 아이에게는 울타리가 필요하고, 강을 건너지 못한 자에게는 뗏목이 필수적이지. 하지만 다 큰 어른이 계속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거나, 강을 다 건넠는데도 뗏목을 등에 지고 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나는 내 다리로 걷고, 이미 강을 건넜다고 판단했네. 자네 눈에는 내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으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그 호랑이가 실체 없는 환영(空)으로 보일 뿐이야. (정색하며) 자네의 근본적인 의문은 이것이겠지. '어떻게 저렇게 세속적 욕망을 즐기면서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미승, 자네는 지금 '깨달은 자는 마땅히 청정하고, 금욕적이며, 욕망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거대한 상(相), 고정관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네. 그 '상'에 비추어 보니, 내 모습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게지. 하지만 그 상(相) 또한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임을 알아야 해. 번뇌의 소멸이 핵심이지, 삶의 형태가 핵심은 아니라네. 산속에서 욕망을 억누르며 사는 것과, 속세에서 욕망을 즐기되 물들지 않는 것, 어느 것이 더 어렵고 높은 경지일까?
사미승: ....... (노인의 말에 다시 한번 말문이 막힌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다.)
노거사: (사미승의 마음을 읽은 듯) 자네가 나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네. 내 삶의 방식은 자네에게는 극약이 될 수도 있으니. 다만, 자네가 오늘 던진 질문들, 자비, 집착, 방편에 대한 그 고민들을 나에게 들이대기 전에, 자네 스스로에게 먼저 비춰보게.
나는 중생에게 진정한 자비를 베풀고 있는가, 아니면 '자비를 베푸는 나'라는 상에 빠져있는가?
나는 수행이라는 패턴, 계율이라는 울타리, 깨달음이라는 목표 자체에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방편을 방편으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는 상에 갇혀, 다양한 불법의 모습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친구 방장 스님이 자네를 내게 보낸 이유는, 나를 교화시키거나 내 논리를 깨부수라는 것이 아닐세. 바로 자네의 그 단단한 고정관념의 벽에 작은 균열이라도 내기 위함이지. 가서 내 이야기 말고, 자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그것이 자네의 공부일세.
사미승: (깊이 고개를 숙인다) ...어르신의 말씀, 깊이 새기겠습니다. 제 자신의 공부가 부족하고, 상에 갇혀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노거사: 혼란은 나쁜 것이 아니야. 굳어있던 것이 깨지는 과정이니. 어서 가보게. 정진하시게.
(사미승은 다시 한번 정중히 합장하고 물러난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하지만, 처음 찾아왔을 때의 답답함과는 다른, 자기 자신을 향한 새로운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노인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식은 차를 마신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다.)
사미승은 논리적으로 노인을 이기지 못합니다. 하지만 불교의 핵심인 '자비'와, 자기기만의 '위험성', 그리고 행위 '패턴 자체에 대한 집착' 가능성을 제기함으로써, 노인의 주장이 가진 미묘한 지점들을 건드립니다. 노인은 이에 대해 방어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질문의 화살을 사미승 자신에게 돌려놓음으로써, 사미승이 '타인(노인)'을 판단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집착과 상(相)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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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와 노인의 교리배틀을 관전했던 사미승이 노인을 다시 찾아와서 그일에 대해 말하는 상황극 만들어봐
과학자와 노인의 교리 배틀, 그리고 뒤이은 연애 컨설팅(?)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본 사미승이, 그 충격적인 광경에 대해 묻기 위해 노인을 다시 찾아온 상황극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상황극: 그날의 법거량, 무엇을 보았는가
장소: 노인의 집 툇마루. 며칠 전과 같이 평화롭다. 등장인물:
사미승: 과학자의 극단성과 노인의 파격적인 논파, 그리고 뜻밖의 결말(연애 상담)까지 목격하고 큰 혼란에 빠짐.
노거사: 모든 것이 그저 흘러가는 바람인 양,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다.
(사미승이 다소 얼떨떨하지만 진지한 표정으로 노인 앞에 와서 합장한다.)
사미승: 어르신, 며칠 전에는 정말 경황이 없었습니다. 다시 찾아뵙니다.
노거사: (찻잔을 들며) 오, 사미승 아닌가. 어서 앉게. 그날 아주 진기한 구경을 했지, 아마? 세상을 한순간에 날려버리겠다는 보살과, 그 보살의 노총각 히스테리를 간파한 늙은이의 한판 승부라. 허허. 자네 공부에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을걸세.
사미승: (앉으며) 솔직히...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과학자라는 분의 계획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정면으로 어기는, 천인공노할 마구니의 짓이라 여겨 몸서리쳤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중생의 영원한 고통에 대한 연민과 윤회 종식이라는 목표를 이야기할 때는, 방식은 틀렸어도 그 근본적인 문제의식 자체는 불자의 고민과 닿아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웠습니다.
노거사: 그렇지. 그래서 더 위험한 게야. 어설픈 악당은 구별하기 쉽지만, 그럴싸한 대의명분과 논리로 무장한 독선은 분별하기 어렵거든. 그는 '고(苦)'를 보았지만, 고의 원인인 '집(集 - 집착, 아상)'이 자기 안에 가장 크게 똬리를 틀고 있다는 것은 보지 못했지.
사미승: 바로 그 점을 여쭙고 싶었습니다! 저는 그저 '살생은 안 된다', '계율을 어긴다'는 생각밖에 못 했는데, 어르신께서는 단번에 그분의 '아상(我相)'과 '중도(中道)의 부재', 그리고... 그... 근원적인 외로움(?)을 꿰뚫어 보시고 논쟁을 파(破)하셨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셨습니까? 저는 계율이라는 잣대로만 그분을 단죄하려 했습니다.
노거사: 허허, 계율이라는 몽둥이만 들고 있으면, 상대가 논리라는 방패로 막아낼 때 당황하게 되지. 그 과학자 양반, 머리가 비상해서 계율에 대한 반박(호국불교, 방편 등)을 이미 다 준비해뒀더군. 그럴 때는 가지를 치는 대신 뿌리를 봐야 하네. 그의 주장을 가만히 들어보니, 온통 '나' 뿐이더군.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방법으로', '내가 구원하는', '나의 희생'... 중생 구제라는 거대한 목표 아래 '영웅적인 나', '구원자인 나'라는 거대한 아상이 괴물처럼 부풀어 있었지. 불법(佛法)의 핵심은 무아(無我)인데, 그처럼 거대한 '나'를 세워놓고 하는 행위가 어찌 보살행이 될 수 있겠나? 뿌리(아상)가 썩었는데 열매(보살행)가 제대로 열릴 리 없지.
사미승: 아상... 그렇군요. '구원하는 나'라는 상(相)... 그리고 중도를 말씀하셨습니다. 과학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2500년간 중생을 다 구제하지 못했으니 실패한 방법이고, 자신의 방법이 획기적이라 주장했습니다.
노거사: 그게 바로 극단이지. 전통적인 수행법이 더디다고 해서, 모든 존재를 강제로 소멸시키는 극단으로 치달았으니. 마치 밥이 더디 된다고 아예 솥을 깨부수고 모두 굶자는 격이야. 그는 '색즉시공(色卽是空)', 세상은 고통이고 허망하다는 것에만 꽂혀서, '그러니 없애버리자'는 단멸론의 극단으로 갔지. 내가 말한 '공즉시색(空卽是色)', 공하기에 오히려 집착 없이 이 순간을 살아낼 수 있다는 중도의 이치는 보지 못한 게야. 번뇌의 소멸이 목표인데, 번뇌할 주체 자체를 없애버리는 건 해탈이 아니라 그냥 파괴일 뿐이네. 억압(고행)도 극단이고, 파괴(과학자의 방법)도 극단이지.
사미승: 하오나 마지막에... '노총각 히스테리', '외로움'을 언급하시며 연애 상담을 하시는 모습은... 솔직히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토록 심오한 교리 논쟁 끝에 나온 결론이라기엔 너무나 세속적이어서요.
노거사: (껄껄 웃으며) 그게 핵심적인 방편(方便)이었네! 논리 대 논리, 교리 대 교리로만 부딪히면 자존심 강한 그 양반은 절대 물러서지 않아. 거대한 아상의 갑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갑옷의 가장 약한 틈새, 즉 '구원자'라는 허울 뒤에 숨겨진 지극히 인간적이고 초라한 번뇌, 그 외로움과 결핍을 정면으로 건드리니 어떻게 됐나? 갑옷이 와르르 무너지고 맨몸이 드러났지. 거창한 우주적 대의명분이 실은 개인의 치기 어린 심술과 다르지 않음을 스스로 보게 만든 게야. 중생의 근기에 맞춰 법을 설해야지. 그 순간 그에게 가장 잘 먹히는 약은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자신의 진짜 번뇌를 직면하게 하는 것이었네. 지구를 날려버리겠다는 사람의 가장 큰 번뇌가 고작 연애 문제라니, 그 모순과 허망함을 스스로 깨닫게 한 거지.
사미승: 아... 방편! 상대의 가장 약한 번뇌를 건드려 아상의 갑옷을 해체시키는... 무서운 방편이십니다. 저는 어르신께서 그저 쾌락을 즐기며 사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과학자의 아상과 집착, 숨겨진 번뇌를 단숨에 간파하시는 모습에서 제가 보지 못하는 깊이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어르신께서는 속세의 온갖 욕망과 쾌락 한가운데 계시기에, 오히려 인간의 번뇌와 집착의 뿌리를 더 명확히 보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속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말입니다.
노거사: (흐뭇하게) 이제야 좀 보이는가. 산속에 틀어박혀 '청정해야 한다'는 상(相)에만 집착하면,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의 진짜 고통과 그 원인을 놓치기 쉽지. 나는 진흙탕 속에 함께 있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네. 과학자 양반이나, 자네나, 나나, 형태는 다르지만 각자의 번뇌와 싸우고 있는 게야.
과학자는 '구원해야 한다'는 상과 '외로운 나'라는 번뇌에.
자네는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 '계율은 절대적이다'라는 상에.
나는 찾아오는 인연과 즐거움을 물리치지 않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려는 노력 속에.
그날의 소동은 자네에게 큰 화두가 될 걸세. 무엇이 진짜 자비인가? 아상이란 무엇인가? 중도란 무엇인가? 방편이란 무엇인가? 계율의 울타리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겉모습과 명분에 휘둘리지 말고 그 뿌리를 보는 연습을 하게.
사미승: (깊이 깨달은 표정으로) 예, 어르신. 그날 저는 거대한 악을 막아주신 것에 감사하면서도, 어르신의 방식에 내심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가진 '불교란 이런 것'이라는 틀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과 그 과학자분, 두 분 모두 제게는 저의 아상과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는 큰 가르침이었습니다. 화두로 삼아 물러가 정진하겠습니다. 귀한 가르침,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깊이 합장한다)
노거사: 그래. 번뇌가 있는 곳에 깨달음도 있는 법이지. 그 과학자 양반도 스스로의 번뇌를 직면했으니, 다음 생에는 엉뚱한 블랙홀 대신 어여쁜 인연을 만들 방편을 연구할지도 모를 일이고. 허허허.
(사미승은 이전과는 다른, 한층 깊어진 눈빛으로 물러나고, 노인은 다시 평온하게 차를 마신다. 툇마루에는 평화로운 햇살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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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미승이 방장스님에게 돌아가서 만남에 대해 보고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장면 만들어봐
상황극 : 거울과 돌멩이 - 사미승, 방장 스님께 고하다
알겠습니다. 모든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목격하고 노인과 대화까지 나눈 사미승이,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자신을 노인에게 보냈던 방장 스님에게 돌아가 보고하는 장면입니다.
장소: 깊은 산사의 방장실. 정갈하고 고요하며, 은은한 묵향이 감돈다. 등장인물:
사미승: 혼란과 충격, 그리고 새로운 의문으로 가득 차 있지만, 스승 앞에서는 공손하고 차분하려 애쓴다.
방장 스님: 사미승의 스승이자 노거사의 오랜 친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온화하고 깊은 눈빛.
(사미승이 방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 삼배를 올린다.)
사미승: 스님, 다녀왔습니다.
방장 스님: (따르던 차를 내려놓으며) 오, 왔는가. 얼굴에 물음표가 가득하구나. 앉거라. 내 친구는 잘 있던가? 자네에게 꽤나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 모양이로군.
사미승: (무릎을 꿇고 앉으며) 예, 스님. 그 어르신... 아니, 거사님을 뵙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거사님 댁으로 가던 중 지구 전체를 소멸시키려던 어떤 과학자를 만나, 거사님과 그 과학자 간의 기이한 법거량(?)을 목격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방장 스님: (눈썹 하나 까딱 않고) 호오, 지구를 소멸시켜? 그거 참 내 친구답게 요란한 손님을 만났구먼. 그래,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느냐. 천천히 말해보거라.
사미승: 처음 거사님을 뵈었을 때는, 솔직히 큰 충격과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깨달으셨다는 분이 세속의 쾌락을 탐닉하며 '공즉시색'과 '무아', '무상'을 논하시는 모습은, 제가 배우고 익힌 불법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논리적으로는 반박하기 어려웠으나, 마음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수행자의 청정한 삶과 계율의 엄중함을 무시하는 궤변처럼 들렸습니다.
방장 스님: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랬겠지.
사미승: 그런데 그 과학자와의 논쟁을 보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과학자는 중생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말하며 모든 생명을 없애는 극단을 행하려 했고, 저는 '불살생' 계율 외에는 마땅히 그를 제지할 논리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거사님께서는 그의 논리를 '아상(我相)'과 '중도(中道)의 부재'로 단숨에 파하시고, 심지어... 그의 거창한 명분 뒤에 숨은 '외로움'이라는 개인적 번뇌를 꿰뚫어 봄으로써 스스로 계획을 포기하게 만드셨습니다. 계율만 붙들고 있던 제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한편으로는, 거사님의 삶의 방식은 여전히 의문스러운데, 그 통찰력은 실로 놀라웠습니다.
방장 스님: (빙긋 웃으며) 자네가 그 친구를 만나 답답함과 혼란을 느끼고, 또 그 과학자와의 사건을 통해 충격을 받았다면, 내가 자네를 보낸 목적은 달성된 셈이구나.
사미승: 스님, 어찌하여 저를 그분께 보내신 것입니까? 그분의 삶의 방식은 결코 수행자의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방장 스님: 자네는 매우 성실하고 올곧은 수행자이지. 경전 공부도 깊고, 계율 지킴에 빈틈이 없어. 허나, 너무 곧으면 부러지기 쉽고,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지 않는 법이라네. 자네에게는 '수행자는 이래야 한다', '깨달음이란 이런 모습이다', '계율은 절대적이다' 라는 단단한 상(相)이 있어. 그 상(相)은 자네를 지켜주는 울타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더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감옥이 되기도 하지. 내 친구는... 자네의 그 단단한 벽을 깨뜨려 줄 아주 별나고 좋은 돌멩이인 셈이지.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
사미승: 돌멩이... 말씀이십니까?
방장 스님: 그래. 그 친구의 삶을 보거라. 그가 번뇌의 소멸을 이야기하고 집착 없음을 말하지만, 그의 방식은 벼랑 끝을 걷는 것과 같아. 범부 중생이 함부로 흉내 냈다가는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기 십상이지. 내가 자네를 보낸 것은, 그의 삶의 방식을 배우거나 따르라는 것이 결코 아닐세. 다만, 첫째, 자네가 가진 '상(相)'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보라는 것이네. 저잣거리 한복판에서도, 심지어 쾌락 속에서도 번뇌를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자네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내라는 뜻이었지. 둘째, 계율과 교리의 문자 너머에 있는 핵심, 즉 아상(我相)과 집착(執着)을 꿰뚫어 보는 눈을 기르라는 뜻이었네. 자네는 과학자를 '계율'로 판단했지만, 내 친구는 그의 '아상'과 '번뇌의 뿌리'를 보았지. 무엇이 더 근원적인 문제이겠는가?
사미승: ......아상과 번뇌의 뿌리... 입니다. 거사님께서 과학자의 외로움을 건드린 것을 '방편'이라 하셨습니다.
방장 스님: 그렇지. 중생의 병에 따라 약을 달리 쓰는 것이 방편이지. 논리와 아집으로 똘똘 뭉친 이에게는, 그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보여주어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어. 물론 아주 위험하고 파격적인 방편이지. 중요한 것은 자네가 그 모습에서 '아, 계율이나 형식에만 얽매여서는 상대의 진짜 아픔과 문제의 핵심을 놓칠 수 있구나' 하는 점을 깨닫는 것이네. 그 친구는 진흙탕 속에 살면서 진흙 속 중생의 생리를 꿰뚫어 보는 눈을 얻은 셈이지.
사미승: 하지만 스님, 그렇게 쾌락을 좇는 삶이 정말로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난 길일 수 있습니까? 자기합리화의 위험은 없습니까?
방장 스님: (잠시 침묵하다) 그것은 그 친구 자신만이 알겠지. 혹은 그조차도 완전히 모를 수 있어.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이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피어나지만, 모든 진흙이 연꽃을 피워내는 것은 아니지. 대부분은 그냥 썩어버릴 뿐이야. 자네는 그 친구를 따라 할 생각은 아예 말아야 하네. 자네에게는 자네의 길이 있어. 엄격한 계율과 꾸준한 수행, 이것이 자네를 보호하고 성장시킬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뗏목이야. 그 친구와 과학자는 자네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일세.
과학자를 통해서는, 자비와 이상을 내세운 독선과 아상이 얼마나 위험한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보고,
내 친구를 통해서는, 고정된 틀(相)에 갇히지 않는 유연함과, 문자 너머의 핵심(아상, 집착)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보되, 그 방식의 위태로움 또한 함께 보아야 하네.
자네가 할 일은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거울삼아 자네 안의 아상, 자네 안의 집착, 자네 안의 고정관념을 비추어 보는 것이네.
사미승: 저 자신을 비추어 보라...
방장 스님: 그래. 그 과학자의 '구원하는 나'라는 아상, 내 친구의 '즐기되 집착하지 않는 나'라는 방식, 그리고 '수행자는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자네 자신의 상(相). 이 모든 것들을 화두 삼아 정진하거라. 혼란스러웠던 그 경험이, 자네의 수행을 한층 더 깊게 만들어 줄 큰 자양분이 될 것이다.
사미승: (눈에 총기가 돌아오며,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조아린다) 예, 스님! 큰 가르침, 뼈에 새기겠습니다. 거사님과 과학자를 판단하려 했던 제 아상을 먼저 살피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신 깊은 뜻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물러가 정진하겠습니다.
방장 스님: (온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물러가 쉬거라.
(사미승은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고 나아갈 길이 명확해진 표정으로 방장실을 나선다. 방장 스님은 식은 찻잔을 들고 창밖의 푸른 산을 바라보며, 홀로 조용히 미소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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