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누가복음 16장 청지기의 비유에 대한 나의 해석

누미 2025. 3. 4. 22:04

누가복음 15, 16장에서 예수는 돈만 밝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논쟁을 하면서 여러 가지 비유를 제시한다. 그중에서 유난히 난해한 내용인 청지기의 비유가 등장한다.
예수가 해왔던 비유들은 모두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운데 청지기의 비유만은 복음의 기록자 위대한 루카가 잘못 받아적은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생길 정도로 상당히 부조리해 보인다. 예수는 왜 그런 이질적인 비유를 했을까? 어쩌면 예수가 마태복음 13장 10-17절, 마가복음 4장 10-12절, 누가복음 8장 9-10절의 내용을 실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듯 예수가 말한 비유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신자로서의 의무이다.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으로 예수가 하고자 했던 원래 뜻을 왜곡하는 것은 죄 사함에서 멀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비유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수긍할만한 진리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청지기의 비유에 대해서는 만족할만한 신학적 해설을 접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주인은 청지기의 영리한 태도에 만족하는 것을 보고 지혜로운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피상적인 표현에 따라가기 급급한 것일 뿐 비유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우려를 느끼게 한다.

첫째, 청지기의 행위가 정말로 지혜로운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청지기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채무자의 빚의 일부를 탕감해 줬다. 청지기와 채무자의 우정은 의롭거나 신실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금전적 이익에 기반한 것이다. 청지기가 일자리를 잃어서 채무자에게 의지하더라도 그가 받을 수 있는 호의의 한계는 그가 탕감해 준 빚인 올리브기름 50말, 밀가루 20 섬을 한도로 한다.


둘째, 좀 더 비관적으로 보자면 청지기의 빚 탕감 조치는 과거의 일일 뿐이다. 채무자가 앞으로는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줄 권한이 없는 그를 계속해서 가까이 할 이유가 없다. 청지기는 자신을 믿고 재산을 맡긴 주인의 신뢰를 배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이익을 얻은 채무자 자신 역시 그를 믿고 우정을 나눌만한 이유가 없다. 단지 이해관계가 맞아서 성립한 계산적 관계일 뿐이다. 따라서 주인에 대한 배임을 통한 빚 탕감으로는 영원한 우정이나 영원한 집을 마련할 수 없다.

주인은 불의한 친구들로부터 영원한 처소를 마련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설마 그게 되겠냐? 한번 자~알 해봐라" 같은 뉘앙스의 일종의 반어법으로 보인다. 반어법이 아니라면 채무자는 불의로 맺어진 우정에 대해서조차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영원히 이어가는 극도로 신실한 사람이 된다. 그런 의로운 사람이 자기 빚을 줄이는 악행인 장부 조작에 가담했다는 점은 자체 모순적이다.

이러한 자체 모순과 반어법이 말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가 필요로 하는 영원한 처소는 불의한 친구가 아니라 주인, 즉 이 비유의 대상인 신뿐이다.


셋째, 이 비유가 바리새파 사람들과 대화에서 그들을 향해서 한 말이라는 대화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 기존 해석대로라면, 주인이 배임을 저지른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칭찬한 셈이다. 그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앞으로도 영악하게 이익만 쫓아도 칭찬받는다’는 뜻이 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한다면 앞서 언급했던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서 "죄 사함을 얻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납득할 만한 해석을 나 스스로라도 만들어보고 싶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이 비유는 믿음보다 돈을 중시하는 바리새인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내가 생각한 이야기의 구조는 이렇다.
예수의 여러가지 비유들에서 일관되게 신은 주인, 아버지를 의미해 왔다. 따라서 주인은 신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아들, 종, 피고용인은 신의 뜻을 따라야 할 사람을 의미하곤 해왔다. 이 비유에서 불의한 청지기는 돈만 밝혀서 예수에게 비판을 당하게 된 바리새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실한 태도를 잃고 돈을 우선시하며 신의 재산을 횡령하거나 탕진했다. 결국 신의 신뢰를 잃었고, 신은 그들의 대표자 지위를 박탈한다. 그것이 청지기의 해고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신은 그들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살 수 있는 일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청지기는 채무자들로부터 빚을 감면해 주는 형태로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가 의지할 수 있는 곳을 만든다. 주인은 이것을 보고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감히 내 재산을 또다시 배임을 저지르다니"라고 화내지 않고 먹고살 길을 찾아가는 그를 너그러운 시선으로 관조한다. 신은 피조물들을 벌주기를 서두르지 않고 사랑을 우선하는 관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은 횡령을 저지른 사람이 작은 일에도 배임이라는 형태로 기민하게 대응할 지력이 있으니 신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큰 일에도 잘 대처할 잠재력이 있을 것이라고 희망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청지기의 비유로 예수가 이런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하려고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1. 나는 주인의 지위인, 주님의 아들로서 너희의 지위를 박탈한다.
2. 그러나 나는 너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겠다. 나는 너희가 이야기 속 청지기 같은 영리함을 보여준다면 그 잠재성을 인정하겠다.
3.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았던 너희의 권한을 최대한 발휘해서 너희가 완전히 해고되기 전에, 사람들에게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을 베푸는 것을 일시적으로 허락하겠다. 권한을 빼앗긴 이후에는 네가 포섭한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의지하며 살도록 하거라.
4. 하지만 그것은 이익으로 뭉쳐진 일시적 관계일 뿐 영원한 처소는 아니다. 그것은 오직 주인에게 복귀하는 것 뿐이다. 한 명의 종이 신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한 번에 섬길 수는 없다. 유일한 주인인 신은 너의 유능과 영리함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니 언제든 개심하고 돌아오너라.

만약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의 이러한 메시지를 읽었다면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신실한 태도로 돌아와서 참된 신앙을 회복하고 천국으로 갔을 것이다. 반면 보고도 모르고, 듣고도 깨닫지 못했다면 예수가 비유로 설명을 한 취지에 맞게, 그들은 죄 사함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