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전지성과 자유의지 그리고 예정론
사람이 기독교 신이라는 개념을 알게 하는 것은 선험적인 지식이나 공통적으로 대부분 사람들이 겪게 되는 종교적 경험 때문은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것이고 그 들려준 사람은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즉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에 근거한 것이다. 성경 없이는 신도, 신의 말씀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앙인에게 성경은 신의 말씀 그 자체기 때문에 그에 반대되는 주장을 할 수 없다. 다만 성경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들에 대해서는 성경의 내용을 논리적, 철학적으로 추론하여 주장해 볼 수가 있는데 그런 추론들이 누적되어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신학은 각종 논쟁과 비판을 겪고 극복해 내면서 신앙인들 사이에서 권위를 얻게 된다. 하지만 그 권위는 성경의 절대성과 달리 상대적 권위에 불과하다. 그것은 성경 텍스트, 즉 절대자로서 신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해석과 추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타당성 있는 이론이 등장하거나 그와 배치되는 성경 구절과 충돌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성격이다.
마치 유서 깊은 판례가 법률과 같은 역할을 하듯 신학 중에서도 삼위일체처럼 사실상 성경 본문이나 다름없는 지위를 가진 것들이 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성경에서 삼위일체 해석을 금지하는 구절을 찾아낸다면 그 위상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인지도 측면에서는 웬만한 성경 구절들보다 훨씬 유명하지만 의외로 신학에 불과한 교리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자유의지론이다. 이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제시된 개념이다.
자유의지론이 성경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신명기 30장 19절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에서 자유의지가 "부여"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보면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기보다 자유의지가 "인식"된 것에 불과하다. 생명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시하면서 자유의지가 잘못 사용되는 걸 막으려는 의미일 뿐이다. 그 구절로 신이 자유의지를 부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이런 패러디를 제시해 볼 수 있다.
"따뜻하게 드실 다양한 음료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황산, 벤젠, 우유, 락스. 무얼 드시든 손님의 자유지만 죽기 싫으면 우유 드세요."
그 외에도 이사야 1:19-20, 예레미야 17:10, 요한계시록 3:20 등등 다양한 구절들이 소개된다. 그러나 역시 그 구절들을 읽어보면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유롭게 굴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면 큰일 난다는 내용들이다.
즉 자유의지가 이론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유로운 선택이 존중되지 않고 인간은 신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구절들이다.
"소련에 언론의 자유는 있다. 다만 언론 후의 자유는 보장되지 않는다"라는 풍자를 연상시키는 자유의지이다.
성경 텍스트의 맥락을 보면 신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 자유의지를 부여했다기보다는 인간을 만들다보니 사랑니, 맹장, 편도선같이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기관처럼 자유의지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자유의지는 수많은 불순종과 잔혹한 처벌을 야기하며 신과 인간 모두를 고통에 빠뜨리곤 했다. 성경에 드러난, 신이 자유의지를 대하는 태도는 이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너희 몸과 마음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줄게. 사랑니를 신경써서 잘 닦아야 충치로 고생을 하지 않는단다. 잘 닦았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잘 안닦일때가 많거든. 그리고 자유의지를 조심하거라. 그걸로 뭐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너무 들떠서 이것저것 저지르다보면 나의 진노를 사게 되고 물벼락이나 불벼락을 맞게 될거거든."
나는 소련에 언론의 자유가 없었다고 알고 있다. 성경을 억지로 쥐어짜서 가져다 붙이려 한 자유의지로는 허울뿐인 자유에 불과하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유의지론은 상대적 권위를 가지는 신학적 개념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자유의지론이 신학적 이론에 불과하고 상대적인 권위를 지님을 깨닫게 되자 기존의 유서 깊은 신학적 논쟁도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길이 보였다. 바로 그 유명한 신의 전지성과 자유의지의 충돌 문제이다.
신의 전지성은 성경의 다음 구절에 직접 제시되어있다. 이사야 46:9-10, 예레미야 17:10, 요한복음 2:24-25. 성경 텍스트에 근거한 것이라 비유하자면 법률이고 자유의지론은 유서 깊은 판례 수준의 권위를 가진다.
성경과 신학이 맞붙은 문제라 상당히 심플하게 해결이 가능하다.
신의 전지성은 성경적 차원의 특성이므로 그 위계상 신학에 불과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우선한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자유롭게 날뛰어도 신은 모든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즉 신의 전지성에 의해 인간의 자유는 사실상 미리 정해진 셈이었다.
자유의지론의 위상을 실제보다 높은 것으로 오해했던 시절에 나는 칼뱅의 예정설을 신이 잘 쓰라고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감히 인간따위가 스스로 반납해버린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여겼었다. 과도한 엄숙주의, 과잉충성, 자기비하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원리를 알고 다시 생각해 보니 예정설이 오히려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된 것으로 보인다. 칼뱅은 예정설을 통해 신의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아 존재론적으로 열위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상대적으로 무의미한 것으로 격하시켰다. 쉽게 말해 "어디서 인간 따위가 신에게 기어올라?"라고 축약할 수 있다. 반면 내 관점은 "어디서 신학이론 따위가 성경 텍스트에 기어올라?"이다. 칼뱅이 내린 결론은 얼핏 인간의 자유를 탄압하는 사상처럼 보일 수 있으나 나의 견해까지 참고해서 보자면 오히려 성경 텍스트에는 더 적합한 해석인 셈이었다.
나는 신학적 지식이 크게 부족하고 아직 성경 완독도 못한 상태이다. 신학적 논쟁에 걸려든다면 별다른 주장을 할 것이 없다. 다만 성경의 권위에 어긋나는 신학 이론이라면 당연히 비판해 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이런 주장을 펼쳐 본 것이었다. 백 개의 판례를 하나의 법조문이 무력화하듯, 성경적 차원의 가치인 전지성 하나면 별도의 신학 이론들은 오히려 걸리적거리기만 할 거라 생각했다.
이번 글은 링크한 글 2번 부록인 "전지함 논증"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그 글은 신앙인처럼 성경 구절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한발 떨어져서 냉정한 관점에서 "단지 말과 선언만 있다고 믿는 게 말이 되나?"라는 관점에서 접근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는 자유의지론과 전지성이 동등한 위계의 교리로 잘못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