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유신론 무신론 논쟁에 대해.

누미 2025. 2. 2. 16:32

요즘은 성경을 보면서 관련된 글을 쓰다 보니까 유튜브에서 기독교에 대한 영상을 몇 번 시청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기독교 이론에 대해 설파하는 영상들이 종종 알고리즘에 잡혀서 시청하게 될 때가 있었다. 썸네일과 제목은 제법 솔깃한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영상들은 대체로 기대 이하였다. 영상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지성에 대한 과도한 확신과 자기 의견에 빈틈이 없다고 여기는 낮은 메타인지 능력을 보이곤 했는데 논리적으로 워낙 허술해서 끝까지 보기 어려운 영상들이 많았다. 비록 내가 기독교 교리에 대해 평가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건 전혀 아니지만 그런 부정적인 시청 경험에 대한 반감과 다소 느껴지는 짜증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글을 남긴다.

 

유신론과 무신론 논쟁은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의 신에 대한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무신론 자체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왜 무신론은 대체로 기독교 신앙을 대상으로 발생한 것일까? 이는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 교리와 적극적 전도 경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논쟁의 구조를 보면 대체로 무신론자가 기독교를 공격하고 유신론은 이를 방어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따져보면 사실은 무신론이 방어적 입장이다.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유신론자로부터 전해 들어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신이 존재한다고 전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주장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때문에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는 입증책임은 주장하는 자에게 있다고 하거나 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증거를 대는 것은 부존재의 증명이기 때문에 입증 책임이 유신론자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유신론자는 성경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제시하는 순환논리에 빠지기도 하지만 형이상학적 존재인 신을 증명하라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 자의적 성경 해석 금지 원칙

유신론자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한 시작점은 그가 신을 알게 된 경로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신은 관찰과 경험으로 체험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성경이라는 텍스트와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지식을 전수해주면서 하나의 밈으로 존재한 것이다.

믿음의 최종적 근거는 성경이다. 유신론자라면 당연히 성경은 신의 말씀 그 자체로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의 내용을 자의적으로 변경해서 적용하거나 성경 텍스트에 기반하지 않은 신학은 근거를 잃은 공허한 주장이자 신학자의 개인적 희망에 불과하다. 무신론자는 기독교 외부의 논리뿐만 아니라 내부적 모순을 지적하는 방법으로도 유신론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그가 그런 목적으로 신앙의 내부 논리를 가정적으로 인정했을 때 유신론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신학이 아니라 성경 텍스트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는 성경이 믿을만한 것인지 여부가 신이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성경은 자체적으로 많은 오류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노아는 남극까지 가서 펭귄을 포획했다가 홍수가 끝나자 다시 남극에 풀어줬을까 같은 다소 유치해 보이는 문제부터 발목을 잡는다.

그 점에 대해 신앙인들은 당시에 성경을 쓴 사람의 인식의 한계나 성경에서 다룬 내용의 상징성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고 변호한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로  역사적 맥락과 상징성을 고려하여 성경을 해석한다면 신의 존재 역시 실체가 아니라 상징과 역사에 불과할 수 있다는 되치기에 직면하게 된다.

사무엘기하에 등장하는 웃사의 죽음을 예시로 들어보자. 웃사는 성괘가 수레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려고 하니까 그런 참상이 벌어지지 않게 성궤를 손으로 받친 사람이다. 그는 성궤를 만질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신분임에도 무엄하게도 성궤를 만졌다는 이유로 신의 꿀밤을 맞고 즉사한다.(성경에는 "치시다"라고 표현된다) 이 구절에서 신앙이 없는 사람은 신의 포악함에 경악한다. 하지만 신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맥락에서 그는 신성모독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일을 한 것이고 다소 가혹했던 그 시대 사람들에 의해 처단을 당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그런 해명은 신을 변호하려다가 스스로 신의 존재와 신의 행위를 부정한 셈이다.  그런 식의 시대적 상징적 맥락을 반영하는 해석은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성경 속 사건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셈 된다. 그런 주장을 하다 보면 신이 실제로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신이 아닌 자기가 결정해 버린다는 문제가 생긴다. 또한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다 보면 성경에 나타난 신의 모든 행적이 사실은 인간이 한 일이고 그것을 상징적 차원에서 신의 행위로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것조차도 가능해진다. 즉 신이 창조된 존재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 사람들의 주류적 문화와 관념에 따라 신의 행동이 변한다는 점에서 신앙인이 스스로 주장한 신의 불변성과도 배치된다는 점에서 자체모순적이기까지 하다.


2. 신은 형이상학적이라고 누가 동의했나?

유신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신은 성경에서 형이상학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선 신은 아담과 같은 형상이고, 아마도 몸 안에는 갈비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신의 행적을 보면 신은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전염병과 우박과 불벼락을 뿌리는 투명한 아저씨라는 형이하학적인 존재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신은 무섭고 투명한 아저씨처럼 사람들에게 지극히 현실적이고 형이하학적인 벌을 내린다. 그가 내리는 은혜는 대부분은 물리적, 생화학적 징벌을 주지 않는 것 또는 초자연적 힘으로 적을 살해해주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여지는 신의 행적에는 형이상학이라고 볼만한 여지가 전혀 없다. 단지 엄청나게 강한 형이하학적인 존재라서 그것을 형이상학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압도적인 양적 차이를 질적 차이로 오인했을 수 있다.

신이 형이상학적인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성경에 등장해서 활약하는 신이 아니라 자기가 바라는 신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 속성을 제시해 본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형이상학적인 신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개념이다. 구약성경에서 신이 스스로 형이상학적 존재인것처럼 선언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제 행적이다. 선언만으로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나도 지금부터 형이상학적 존재가 되겠다. 성경에서 신이 형이상학적인 행적을 보인 적은 내가 아는 한은 없다.

형이상학적 신이란 관념은 주장하는 사람의 상상 속 존재에 불과하다. 이는 중세 유럽에서 신학자들이 만들어낸 신에 대한 새로운 관념일 뿐이다. 성경의 문구에 근거하지 않는 신학은 그것이 아무리 많은 사람의 지지를 오래 받아 왔더라도 질적인 측면에서는 주장의 근거 자체가 상상과 추론일 뿐이므로 거대한 뇌피셜의 집합일 뿐이다.

물론 성경에서는 신의 형이하학적 모습이 등장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신론자들은 너무나 당연하다는듯 신이 형이상학적 존재라고 정의하는데 그것은 별도의 입증이 필요한 명제라는 점을 은근슬쩍 넘어가서는 안된다.


3. 왜 기독교 신만 신인가?

그밖에 다른 신앙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유신론자 입장에서는 기독교의 신이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이지만 무신론자 입장에서는 신이 존재하는가 이전에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왜 하필 비로자나불이나 비슈누, 제우스, 오시리스, 오딘이 아닌 기독교의 신이여야만 하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제우스가 기독교의 신에게 축출당한 것은 교리적 또는 논리적 열등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엄연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기독교의 신이 존재하고 그가 세상을 만들고 다스리는지 여부를 논증하는 것은 근원적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그러나 그 기원은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결단으로 시작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신은 무신론과 옳고 그름을 다투기 이전에 다른 수많은 신들과의 우열을 우선적으로 가리는 게 맞다.

제우스와 오딘은 현재 모든 신자를 잃은 상태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그 신의 존재를 부정해도 된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구약의 신 역시 요셉 이후에 잊혀진 후 모세가 등장할 때까지는 신자가 없는 잊혀진 신이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신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기독교 신자가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른 신들 역시 그런 휴지기 상태일 수 있다.

한편 비로자나불은 대승 불교에서 세상의 본질적 실상인 '공'의 개념을 상징하며, 물질적 행동 없이도 우주와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형이상학적 존재로 여겨진다. 그는 형이하학적으로 날아다니면서 전염병과 우박, 불벼락을 뿌리지 않고도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한다. 세상을 만든 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그 신이 아니라 그 자체가 우주인 비로자나불이라는 대승 불교 신자의 주장에 기독교 신자는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4. 강한 무신론, 강한 불가지론의 문제점

한편 불가지론은 얼핏 생각하기에 안전한 포지션으로 보인다. 다만 강한 불가지론은 형이상학적이라는 신의 속성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의 존재를 알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 자의적으로 신을 형이상학적인 존재로 단정해버린다는 논리적 비약 있다.

강한 무신론은 전지하고 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하다면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라는 식의 귀류법을 활용한다. 그러나 이 역시 신의 속성을 근거 없이 자의적으로 전지, 전능, 전선으로 단정해버린다는 비약이 있다. 극단적인 예시로 반론하자면 전지전능하고 선한 신은 맞는데, 다른 전지 전능한 두 위 이상의 신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느라 신경을 못쓰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듯 강한 무신론과 강한 불가지론은 모두 유신론자가 주장하는 신의 다양한 속성들에 대한 반작용이다. 유신론의 주장이 약해지면, 예를 들어 "신이 존재하기는 하는데 마음씨 고약한 투명한 아저씨이고 사람 머리 위 10미터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제멋대로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고 다닌다"라는 식의 주장을 한다면 강한 무신론과 강한 불가지론 역시 반사할 빛이 없어져 반짝이지 못하는 보석처럼 되어버린다.


5. 약한 의견의 강점.

확실한 것이 밝혀져있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는 게 안전하다. 약한 불가지론, 약한 무신론이 그것이다.

약한 불가지론은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나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확신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모르겠다고 인정하니까 딱히 공격받을 포인트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판단과 주장을 펼친다기보다는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 자체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해 보일 수 있다. 준비물은 회의적 태도만 있으면 된다. 알 수 없는 것이니 지적인 추론과 고민을 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약한 무신론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부존재의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입증책임을 유신론에게 떠넘기는 것이 가능해진다. 또한 강한 무신론과 마찬가지로 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물음 등으로 귀류법을 시도할 수 있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듯 유신론자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내세우는 성경 자체의 신뢰성을 문제 삼으면서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잘못된 근거에서 파생된 믿음이 아닌 거냐고 공격할 수도 있다. 약한 무신론은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방법의 공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논쟁에서 편한 포지션을 차지한다.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세일즈맨에게 "나를 설득해 봐"라는 태도로 까다롭게 구는 고객처럼 심사와 평가를 하는 입장이 될 수 있다.


6. 종교의 특기, 도덕적 감화에 대해서.

신을 부정하면 도덕도 없어져서 사회적 혼란이 생기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무속신앙이나 부두교도 종교인데 거기에 어떤 도덕이 있는가? 남자아이는 죽이고 여자아이는 처녀만 살려서 갖고 나머지는 죽이라는 민수기 31장 17,18절에 무슨 도덕이 있나?

동아시아는 2천년 이상 신 없이도 세계 어느 지역들보다도 인의예지신 같은 도덕을 숭상하며 살아왔다. 따라서 종교가 도덕의 확립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는 것은 비약적이다. 

그렇다면 유신론자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최우선 과제는 성경이 비록 다소 오류는 있지만 믿을만하다는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근거가 있었다면 애초에 무신론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신이 강조하는 메시지인 사랑과 용서, 희생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만 이 방법은 신이 구약에서 워낙 엄청난 일들을 벌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신이 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고집을 약간 접어 보는 걸 고려해 볼 수 있다. 구약시대의 신은 잔혹한 존재였지만 이후 예수의 희생을 거쳐서 선하고 자비롭고 성숙한 존재로 거듭났다고 유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애초에 자신의 특기도 아니었던 논리적 논변으로 반박을 시도하기보다는 진정성 있는 선행을 통해 상대에게 감동을 주고 감화시키는 전략을 택하는 것이 효과적인 대응 방법이라고 판단된다. 다시 말해, 본받고 싶은 사람이 되고, "저런 사람이 믿는 신이라면 나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이끌어내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