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입다(Jephthah)와 라헬

누미 2025. 1. 22. 01:36

성경을 읽으면서 그 잔혹함에 경악했던 사사기 11장에 가상 인물을 넣고 살을 붙여서 각색해 봤다.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길르앗의 장군 입다는 암몬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집에서 자기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의 목숨을 바쳐야 할 만큼 그에게 절실한 전투였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는 길르앗에서 아직 이방인 같은 존재였다. 전투에서 지더라도 그는 짐을 싸서 자기에게 속한 가솔들만 데리고 자기가 원래 살았던 돕으로 다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사실 그에게는 껄끄러운 이복형이 있었다. 그는 배다른 형제인 입다를 '창녀의 자식'이라 부르며 가문에서 쫓내는데 큰 역할을 했었다. 쫓겨난 그는 돕에 자리 잡았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길르앗에 외적의 위협이 닥치자 그의 이복형은 군사적 재능이 있는 입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그를 다시 길르앗의 미스바로 불러들였다. 그러고도 뒤에서는 입다를 견제하고 험담하곤 했다. 입다는 자기에게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경멸하는 오만하고 배은망덕한 그자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싶었지만 길르앗 세력의 혼란과 분열을 걱정한 장로들의 만류로 그러질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복형은 돕에서 돌아온 입다의 가족들에게 자기 집의 방들을 내어주며 임시 거처로 지내게 했다. 입다가 개선을 하면 이복형은 관례에 따라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가장 앞자리에서 그를 맞이하러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집에서 가장 먼저 마주칠 사람은 이복형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입다는 신에 대한 서원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내부의 적까지 한 번에 해결하는 계략을 세운 것이었다. 

 

신에게 서원을 한 후에 입다는 쉽지 않았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된다. 입다는 당당하게 개선했고 집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외동딸은 문 뒤에 숨어서 아버지를 기다리다가 마치 오랫동안 주인을 만나지 못한 강아지처럼 뛰어나와서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겼다. 입다는 아기양처럼 귀여운 딸의 포옹에 망연자실 해져서 주저앉아버렸다. 눈엣가시를 제거할 요긴한 명분이 물거품이 된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딸을 제물로 바치게 된 운명에 그는 경악을 했다. 차라리 패전을 하는 게 나을 뻔했다. 하지만 신과의 약속을 깰 수는 없었다.

 

입다의 딸은 자신이 제물로 바쳐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얼어붙어버렸다. 굵은 눈물이 그녀의 뺨에 흘렀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들릴 듯 말듯한 혼잣말을 했다.

"라파, 나 어떡해?"

 

라파는 이스라엘과 므낫세 지파의 역사를 기록하는 서기관이면서 시인이기도 했다. 입다가 돕에서 돌아올 때 라파는 서기관으로서 행정적인 업무를 도와줬다. 입다의 딸은 예의 바르고 현명한 그의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특히, 글을 쓸 때면 짓는 진지한 표정과 나지막이 읊조리는 시 구절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는 수줍음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종종 간식을 들고 서기관의 집무실을 찾아가서 므낫세 지파의 역사에 대한 질문을 하곤 했다.
"서기관님, 혹시 므낫세 지파가 이 땅에 정착한 초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파는 그녀의 붉어진 뺨과 반짝이는 눈빛에서 진짜 의도를 눈치챘다.
"물론이지, 어떤 이야기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보게."
라파는 작성중이던 두루마리를 옆으로 치우고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녀은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라파는 그녀의 미소에서 따스한 봄 햇살과 같은 온기를 느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거의 매일 라파의 집무실을 찾았고, 두 사람은 므낫세 지파의 역사뿐만 아니라, 서로의 꿈, 희망, 슬픔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더 가까워졌다. 라파는 '오늘은 그녀가 어떤 질문을 할까?' '오늘은 어떤 간식을 가져올까?'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기대하며 그녀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되었고 그렇게 둘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녀는 언젠가 라파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해달라고 신에게 종종 기도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에게 부탁한다.
"아버지, 저와 상의도 없이 하느님께 저를 파신건가요? 그 대가가 전투에서의 승리니까 어찌 보면 비싸게 잘 파셨어요. 보잘 것 없는 제 목숨 하나로 많은 우리 동포들의 목숨을 구한 셈이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워요. 저는 남자를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되었네요. 저에게는 마음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두 달만 시간을 주세요. 친구들과 산에 들어가서 원 없이 울어보기라도 하고 싶어요."

딸의 간곡한 부탁에 입다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심 딸이 산에 간다고 말하고는 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다른 먼 나라로 도망치기를 바랐다. 입다는 전도유망한 젊은 서기관 라파와 자신의 딸이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는 라파에게 딸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해줄 것을 부탁한다.


"자네 우리 딸 어떻게 생각하나? 내 딸이라서 내 입으로 칭찬하기 쑥스럽긴 하지만 제법 예쁘지 않나? 자네가 내 딸의 마지막 시간을 좋은 기억으로만 채워주면 고맙겠어. 그건 그렇고, 하느님이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께 우리 영토를 유프라테스강까지 주겠다고 약속하셨던가? 혹시 하느님은 그 너머에 사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없으실 것 같지 않나? 갑자기 쓸데없는 호기심이 들었군. 늙어서인지 말이 많아진 것 같아. 미안하네."

라파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입다의 딸이 산에 들어가기 전날 밤에 라파가 그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도망가자. 아주 멀리. 하느님이 관심 가지지 않을 곳으로 말이야."


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의 자비와 공의로움을 믿고 있었다. 그녀는 라파에게 대답한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곳을 만드신 분이야. 나는 이미 제물로 약속되었고 아마도 보이지 않는 제물의 낙인이 나에게 이미 찍혀 있을 거야. 내가 어딜 가든 그분은 나와 함께 하실 거야. 하느님이 죄 없는 내 목숨을 함부로 빼앗으려고 하실 리 없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은 중단시키셨지. 나에게도 비슷한 처분을 해 주시지 않을까?"

 

라파가 무언가 말하려는데 그녀는 말을 잇는다.

"도망가겠다는 생각 자체가 죄일 수 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어. 혹여 도망쳐서 제물이 되지 않고 살아남더라도 결국 나는 스올에서 죄인인 상태로 그분과 만나게 되겠지. 하느님과 마주할 때는 죄가 없는 상태여야 나에게도 좋을거야."

 

라파는 마땅히 그녀를 설득할 말을 찾지 못하고 쓸쓸하게 그녀를 떠나보냈다. 그녀는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산에 들어갔고 결정적인 순간에 신의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깊은 믿음을 가지면서, 그러면서도 신과의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면서 울고 또 울었다. 친구들은 현명하고 상냥한, 마을의 보배나 다름없었던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기도하고 울기를 반복하며 슬픔을 나눴다.

 

라파는 매일 일과가 끝나면 입다의 딸을 찾아 산에 올라와서 글을 모르는 그녀를 위해 토라를 읽어주고 시를 지어주며 그녀의 마음을 달래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널 제물로 받으실 리가 없어."
딸은 대답했다.
"라파가 읽어주는 토라를 듣고 몰랐던 하느님의 행적을 알게 되었어. 그런데 알아갈수록 나는 그분이 점점 무서워지고 있어. 그분은 이미 세상을 한번 멸망시킨 적도 있어. 도시도 그랬고, 이집트 사람들도... 심지어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도 수 만 명을 직접 살해하시기까지 한 줄은 정말 몰랐어. 제의를 모시다가 실수를 하면 신관을 불태워 죽이기도 하셨잖아. 그런 분이 나 같은 평범한 여자애 목숨 하나에 신경이나 쓸까?"
라파는 그녀를 따뜻하게 포옹했다.

"너는 절대 평범한 여자애가 아니야."

라파는 그녀의 콩닥대는 맥박을 느끼면서 그 울림이 자신과 영원히 함께하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했다. 그러나 라파와 입다의 딸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 중 누구도 신의 응답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산에 들어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한 친구가 백합과 수선화, 금작화, 양귀비, 아네모네를 잔뜩 꺾어와서 입다의 딸을 단장해 줬다.

"하느님께 바치는 소처럼 날 꾸미는 거야?"

입다의 딸은 간만에 미소를 지으며 친구에게 농담을 던졌다.

친구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웃으니까 역시 너답네. 보기 좋아. 며칠 전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잖아. 이렇게 꾸며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서기관님께도 맨날 우는 모습 말고 가끔 이렇게 예쁜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고 친구와 함께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은 무심히 가야 할 곳으로 향했고 그녀에게 미소를 선물했던 형형색색의 꽃잎들은 거무틔틔한 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입다의 딸이 용기를 내어 라파에게 조심스럽게 그동안 억눌러왔던 궁금함에 대한 부탁을 한다.

"라파, 토라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그 종들에게 요구했던 할례라는 걸 하면 어떻게 되는지 항상 궁금했어. 그게 우리 신앙의 상징이라며?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그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산에서 내려가서 제물로 바쳐지면 나는 그게 어떻게 생겼는지 끝내 알지 못하게 되는 거야. 미안하지만 라파가 혹시 보여줄 수 있어?"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라파를 응시한다.

라파는 곤란해하다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눈 앞에 존재할 시간이 거의 남지 않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줬다. 입다의 딸은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생긴 거였구나. 그리고 나는 이것 때문에 죽게 되는 거구나. 그동안 정말 궁금했는데 막상 직접 확인하니까 좀 허탈해. 그래도 후련해. 부끄러웠을 텐데 보여줘서 고마워. 라파."

붉어진 얼굴을 잠시 돌리고 있던 라파는 다시 그녀와 눈을 맞추고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조심스럽게 감싸안으며 속삭인다.
"괜찮아."

구름 한점 없는 늦은 봄날이었다.


그렇게 약속한 두 달이 지났다.
입다의 딸은 라파와 손을 잡고 친구들과 함께 산을 내려왔다. 라파는 억지로 미소 지으면서 그녀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며 말한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구나. 절실히 애원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고마웠어. 전부, 다... 잘 지내야 해. 라파."
그녀의 찬란했던 마지막 봄은 그녀의 대답과 함께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마을에는 입다의 딸을 불태울 제단을 마련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앞에 세워졌다.

초췌해진 몰골이 되어버린 입다는 딸의 귀환에 실망하며 라파에게 말을 건넸다.
"라파, 아이를 산으로 보내던 날 나는 자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 기대했었다네. 하긴 두 달 안에 유프라테스강을 건너기는 무리였을 거야. 쓸데없는 말을 했던 거 미안하네."
라파는 촉촉해진 눈동자를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면서 말한다.
"가려면 갈 수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따님이 그러길 원치 않았습니다. 아버님께 말씀드리긴 부적절할 수는 있지만 다시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던 두 달 동안 차라리 따님에게 남자를 알게 해 주면 어땠을까, 아니면 자기가 싫다든 말든 강제로라도 멀리 끌고 갔으면 어땠을까라는 후회가 들기도 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라파의 말에 입다는 눈을 감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뭔가 결심한 듯 눈을 떴고 제사장에게 소리쳤다.
"개선을 했을 때 저를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제 딸이 아닙니다. 저는 원래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집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오만에 빠져서 불경하고 어리석은 욕심을 부렸던 또 다른 저 자신입니다. 무고하고 어린 제 딸보다는 죄 많은 제가 제물로 훨씬 어울립니다. 저는 전쟁에서 공도 세워봤고 신의 은혜도 듬뿍 받으면서 살만큼 살았습니다. 제 아이에게도 하느님의 선물, 행복을 느끼는 삶을 충분히 경험해 볼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

 

입다의 이복형은 이죽대고 싶은 속마음을 억누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한다. 

"맞습니다. 죄 없는 제 조카를 풀어주세요. 그 아이는 저의 목숨을 구한 제 은인입니다."

그는 입다만 미워했을 뿐 그의 딸까지 미워했던 건 아니었다. 그의 말에는 입다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뉘앙스의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그 역시 착하고 어린 조카가 제물로 바쳐지는 것 자체는 애석하게 여겼다. 그의 말은 양가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고 창녀의 자식이라고 멸시하던 이복동생에 대한 완전한 기만과 조롱만은 아니었다.


제사장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입다에게 말한다.

"계시에 따르면 그대는 앞으로도 쓰임이 많을 사람입니다. 그리고 누가 제물인지를 결정할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있습니다. 나는 대행자에 불과합니다."


라파는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입다 장군의 서원에 하느님이 명시적으로 대답하시며 언약이 유효하게 이루어졌다고 응답한 적이 있었습니까? 단지 장군의 혼잣말 아니었나요? 하느님께서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약속이 확실합니까? 혹시 악마에게 속아서 거래한 것 아닙니까? 이건 미친 짓입니다.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혹시 압니까? 그만두라고 새로 계시를 내리실 지도 모르잖아요."

군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입다의 딸은 기도에 집중하느라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들의 절규가 들리지 않았다.

제단 앞에 서있던 그녀는 붉게 물든 눈을 지그시 감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자비롭고 공의로우신 하느님, 저는 라파와 가정을 꾸리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낳고 기르며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한없이 위대하신 당신에게 보잘것없는 제가 정말 지금 꼭 필요하신가요?... 정말인가요?... 정말인가요?... 정말인가요?... 정말인가요?......"

 

그녀의 기도를 듣고 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그 순간 푸른 하늘에서 번개가 치면서 기도 중이던 입다의 딸이 쓰러졌다. 번개는 언제나 세상 어디에도 떨어질 수 있다.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그녀를 짓눌러버린 그 은혜로운 번개는 그녀의 고통과 사람들의 죄책감을 다소 덜어주고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 라파는 혼절해 버렸다. 제사장은 맑은 하늘에서 친 그 벼락을 불필요하게 지체되는 번제에 대한 신의 경고로 보았다. 다음 번 번개는 자기에게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입다는 쓰러진 딸을 끌어안고 끝까지 자기가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울부짖는 입다를 끌어내게 하고 생사가 불분명한 입다의 딸을 제단 위에 올리고 심장에 제례용 청동검을 박아 넣는다. 늑골와 가슴뼈가 부서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고 그녀의 순백색 튜닉에 새빨간 꽃잎들이 피어났다. 얼마 후 제단은 불타올랐다. 장작과 살이 타는 소리는 흡사 날카로운 비명처럼 들렸다. 어린양처럼 새하얀 그녀로부터 만들어진 검은 연기는 끝없이 뿜어져 나와 하늘을 뒤덮고 햇볕을 가린다. 아름답고 순결하고 신앙심 깊은 처녀는 그렇게 연기가 되어 신의 품에 안기게 된다.

라파는 깨어났다. 하늘은 이미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혼절하는 바람에 가장 끔찍한 장면을 보지 못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사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위로한다. 녹초가 된 제사장의 퉁퉁 부은 눈에도 회한이 고여 있었다. 그는 반쯤 쉰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유감이네. 라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내 생애에 가장 힘든 제사였어. 서기관인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내 스승님도 사람을 제물로 바쳐본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예전에 아간이라는 사람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던데 그런 건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개인적으로 칼자루로 전해지는, 사람의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서지는 그 느낌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네."

"..."

그렇지만 신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네. 그리고 신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인간으로 겪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임을 잊지 말게. 자네뿐만 아니라 하느님도 역시 그녀를 가까이하고 싶으셔서 데려가셨을 거야. 우리 길르앗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까이하고 싶어 하는 착한 아이였잖아. 그리고 언젠가 그녀는 자네와 다시 만나게 될 거야."

'..."
제사장의 위로는 다소 설교적이었지만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라파의 귀에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살인자'.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재가 되어버린 그녀를 항아리에 담았다. 그리고 지난 두 달 동안 자기가 연인과 겪었던 일을 기록으로 남긴 후 마을을 떠났다. 서기관의 인장이 찍혀있는 문서였지만 므낫세 지파는 이를 공식 기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라파는 그녀를 품고 시리아를 지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는 배에 올랐다. 강의 가운데에 다다랐을 때 라파는 마치 그녀의 얼굴을 감싸듯 항아리에 입을 맞추고는 그녀의 재를 강물에 흩뿌렸다. 라파는 그대로 강을 건너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사장은 얼마 후 입다를 찾아와서 침울한 표정으로 위로를 한다.

"장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따님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저는 오늘 새벽, 하느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장군께 전해 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따님께서 눈물을 참으며 하느님께 정말 자기가 필요하냐고 반복하며 물을 때는 당신께서도 그 아이와 장군을 긍휼히 여기고 거기서 그만둘까 마음이 흔들셨다고 합니다. 그때는 저도 눈물을 참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장군의 서원이 순수하지만은 않았던 점을 다소 언짢게 보셨다고 합니다. 신과의 약속은 악용되어서는 안 될 엄격한 것이고 반드시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 일은 제게도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장군께서 느끼셨을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입다는 갸우뚱하면서 되물었다.

"좋은 소식이라고요? 제사장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제사장은 말을 이어갔다.

"어려웠을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께서 장군께 더 예쁜 딸을 하나 선물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장군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심혈을 기울여서 여자 아기 하나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장군에겐 늦둥이라 특히 아주 귀여워하게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이로 장군께 충분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입다는 어이없다는듯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보상이라고요?"

 

제사장은 이제야 드디어 좋은 소식을 전달하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럼 제가 아는 이야기로 하느님의 의도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전에 욥이라는 남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하느님께서는 그의 자식 10 명을 한꺼번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 말고도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견디기 힘든 시련을 많이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욥이 끝까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보여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서 빼앗으셨던 것들을 두 배로 되돌려주셨습니다. 아이들도 10 명을 새로 주시면서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그중에 세 명이 딸이었는데 이름은 여미마, 긋시아, 게린합북이었다고 합니다. 그 딸들은 땅 위의 어디에서도 그만큼 아라따운 여자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장군께서 새로 받으실 딸이 그 정도로 예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들 욥을 부러워했습니다. 하느님의 솜씨니까 장군께서도 크게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장군의 가정에 어떤 아이가 태어날지 저도 기대가 큽니다. 아마도 우리 므낫세 지파를 넘어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제사장의 목소리는 흥분한 듯 점점 커졌고 그는 만면에 악의 없는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다는 한숨을 푹 쉬더니 처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사장님. 하느님께 제 말을 그대로 전달해 주십시오. 위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제가 하느님 곁에 가기 전까지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제 아이를 잘 돌봐주세요. 그리고 순수하지 못했던 죄인에게도 보상을 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린양을 하나 잃었으면 다른 어린양을 다시 하나 받아서 보충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혹시 그 욥이란 사람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10 명의 자식들 그리고 제 딸의 이름이 뭔지 기억하십니까? 아무도 제 딸아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다만 "입다의 딸"로 기억될 뿐입니다. 희생제의 양처럼 불태워진 그 아이의 이름은 **입니다. 예쁜 새 아이를 주신다고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이 아닙니다. 새 아이 이름은 어린양을 뜻하는 라헬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실 어린양 라헬로부터 저는 최고의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은 항상 저를 슬프게 할 겁니다. 라헬도 **처럼 제 손등에 난 볼록한 점을 만지작거리길 좋아할까요? 문 뒤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저를 놀래키기를 좋아할까요? 해가 잠시 사라졌던 날 **과 함께 나란히 앉아서 숨죽이면서 다시 나타나는 해를 바라보며 느꼈던 경이로움을 라헬이 공감해 줄 수 있을까요? **이 저를 위해서 만들고 있던 허리띠를 라헬이 완성시켜 줄까요? 아마 그 욥이라는 아비도 저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전지하시다는 데에는 일말의 의심도 없습니다. 다만 공감까지 잘하시는지는 어리석은 저로서는 도저히 판단하지 못하겠습니다. 저의 이런 말이 불경스러운 것이었다면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징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의 얼굴을 하루 빨리 보고 싶을 뿐입니다."

 

신난 채로 자기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제사장은 입다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제사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갈라진 목소리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직업적인 태도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 우리는 하느님의 계획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종종 우리에게 큰 고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분의 큰 계획의 일부로 믿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이렇게 말하고는 입다와 긴 포옹을 했다. 입다는 제사장의 몸이 미세하게 떨림을 느꼈다. 제사장은 붉어진 얼굴을 땅바닥에 푹 숙이고 돌아갔다. 입다가 쏟아낸 말에 신은 한마디도 응답하지 않았다. 얼마 후 에브라임 사람들은 억지 명분을 내세우며 길르앗을 침략했다. 입다는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압도적인 힘과 기민한 전술로 그들을 학살한 후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린다. 그러자 그의 이복형도 더 이상 그를 멸시하지 못하고 그의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게 되었다.

 

 

에필로그

 

그리고 천사 같은 라헬이 태어났다. 그리고 라헬만큼 예쁜 딸들이 연이어 셋이나 더 태어났다. 입다는 라헬의 동생들에게 각각 여미마, 긋시아, 게린합북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나 입다는 사랑스러운 네 딸이 성장하는 모습을 끝내 함께하지 못한다. **의 목숨이 신에게 바쳐지고 사사가 된 후 6년이 지나 그 역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신의 걸작품 라헬과 동생들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랐다. 이윽고 라헬은 **이 산에 들어갔던 나이가 되었다. 그 해부터 그녀는 매년 꽃이 필 때쯤이 되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언니를 추모하러 동생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산에 들어갔다. 그녀들은 서로를 봄 꽃으로 단장해 주고는 나흘 씩 울다가 내려왔다. 그 모습은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보는 이들로부터 눈물을 자아내게 했다. 이를 애석하게 여긴 이스라엘 여자들은 매년 라헬을 따라서 나흘간의 애도에 동참하며 **을 기억하려 했다.

 

그로부터 6세기 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라파의 두루마리'라는 히브리어 문헌이 발견되나 유대 율법학자들은 이를 위서로 판정한다. 라파라는 인물의 존재와 희생제의 양이 되어 버린 **의 실제 이름, '라헬(히브리어로 암컷 양, 또는 어린 양이라는 뜻)'이 적혀있었던 유일한 기록물이었던 그 두루마리는 이후 도서관 화재로 전소된다.

 

 

 

 

 

 

 

 

 

 

부록:

모두가 행복해진 평행우주의, 대충 휘길긴 if 스토리

 

 


입다의 딸이 산에 들어가기 전날 밤에 라파가 그녀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도망가자. 아주 멀리. 하느님이 관심 가지지 않을 곳으로 말이야."

하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신의 자비와 공의로움을 믿고 있었다. 그녀는 라파에게 대답한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곳을 만드신 분이야. 나는 이미 제물로 약속되었고 아마도 보이지 않는 제물의 낙인이 나에게 이미 찍혀 있을거야. 내가 어딜 가든 그분은 나와 함께 하실 거야. 하느님이 죄 없는 내 목숨을 함부로 빼앗으려고 하실 리 없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은 중단시키셨지. 나에게도 비슷한 처분을 해 주시지 않을까?"

라파:

라헬. 너 정말 순진하구나. 하느님이 얼마나 잔인한 분인지는 토라 전문가인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너는 이삭과는 완전히 다른, 별 볼 일 없는 존재에 불과해.

라헬:

(목소리를 높임) 라파!! 하느님이 잔인하다고? 그리고 내가 별볼일없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말 하지 마. 무서워.

라파:

(침착하게) 하느님, 아니, 신은 말이지,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잔인한 존재야. 10명 남짓한 사람만 남겨놓고 인간을 멸망시킨 적도 있고 도시 두개를 한방에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했고, 이집트 사람들도 엄청나게 죽였지. 광야에서는 우리 조상 수만명을 자기가 직접 죽이기도 했어. 게다가 자신에게 올리는 제사의 의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평생 자신을 모셔왔던 가장 충실한 종 아론의 아들 두 명을 불길로 삼켜버리기까지 한 존재야. (놀라는 라헬을 쳐다보며)네가 아는 그 아론 맞아. 너 따위를 돌봐줄 이유가 없다고. 그런데 이삭은 왜 봐준 줄 알아?

라헬: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갸웃한다) 듣고보니 그렇긴 하네. 하지만 이삭의 번제를 중단시키시긴 했잖아. 왜 나는 안될까?

라파:

이삭이 번제의 제물이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110살이었어. 아브라함은 유일하게 신에게 신앙을 약속한 사람이었어. 신의 성마른 행적 때문에 롯조차 떠났고 아브라함만 유일하게 남았던 셈이지. 그런데 이삭이 죽어버리면 110살의 아브라함이 다시 아기를 키워야 하는데 그 아들이 사람 구실 할 정도로 성장하려면 아브라함은 130살까지 살아야 했을 거야. 그리고 사라도 100살 노인이라 출산은 더 힘들어졌지. 신은 이삭이 불쌍해서 제물로 받지 않았던 게 아니라 이삭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살려준 거야. 그런데 라헬. 너 뭐라도 돼? 네 아버님이 아론보다 중요한 사람이야? 너는 물론 나에겐 소중한 사람이야. 하지만 신에게 넌 아무것도 아니잖아. 네가 있든 말든 신은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자의식 과잉도 병이야. 그러니까 도망가자.

 

라헬:
(걱정스러운 표정) 하지만 하느님은 제물로 예약된 나를 계속 주시하실 텐데?

라파:
여전히 너 자의식 과잉에서 못 빠져나왔구나? 하하하. (라헬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라헬 너는 순진해서 더 귀엽다니까. 입장 바꿔봐. 네가 개미 한 마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데 그게 네 시야 밖으로 벗어났다고 쳐봐. 너 같으면 그 개미를 찾아다닐래? 아니면 눈 앞에 있는 다른 개미 하나를 새로 골라서 가지고 놀래?

그리고 혹시 그 양반이 스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중에 너에게 죄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

(웃음을 참으며) "저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신명기 12장 31절과 18장 10절을 위반한 죄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급하니까 길게 따지지 말고 그냥 외워. 나중에 한가해지면 그 양반한테 어떻게 반박할지 내가 천천히 가르쳐줄게. 너는 예쁘긴 한데 머리는 약간 나쁜 편이니까 반복해서 숙달해야 해. 자~~ 따라 해 봐. 신명기 12장31절, 18장10절, 12장31절, 18장10절


라헬:
(활짝 웃으며 라파를 포옹한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한다니까. 내가 똑똑한 라파를 만난 건 행운이었어. 신명기 12장31절, 18장10절, 12장31절, 18장10절, 12장31절, 18장10절, 12장31절, 18장10절........

라파와 라헬은 그 길로 어둠을 틈타 맨몸만으로 마을을 빠져나와서 시리아를 지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강가 마을에 자리 잡고 고향을 바라보며 10명의 자녀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약속한 두 달이 지났다. 제사장은 입다를 재촉한다.
"오늘이 약속된 번제일입니다. 따님은 언제 내려옵니까? 급합니다. 이러다가 정말 큰일 납니다."

입다가 의뭉스럽게 순진한 표정을 연기하면서 대답한다.
"요즘 연락을 잘 안 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다 커서 내놓은 자식이라서... 한번 직접 찾아보시죠."

제단 옆에서 제사장이 종종걸음을 치고 있는데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한 번 치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이 저물자 사람들은 제단에서 저녁밥 지을 장작을 챙겨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제사장은 이후에 있을 후환을 걱정하며 며칠 마음고생을 하다가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 걸 보고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입다는 자신이 승전한 전장에 조용히 방문해서 체구가 작은 암몬 전사의 사체를 골라냈다. 그걸 반쯤 불태워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장례를 위한 여러 겹의 두꺼운 천으로 시신을 아주 꽁꽁 감쌌다. 그는 라헬이 멀리 가지 못하고 신의 징벌을 받아서 불타버렸다고 거짓 눈물을 흘리면서 제사장에게 그것을 보여줬다. 여자로 보기에는 가슴도 납작하고 여자 치고 허리도 다소 굵어 보였지만 제사장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라헬이 얼굴은 예쁘긴 했는데 몸매가 저랬었나?'라는 의심이 살짝 들었다. 그는 입다에게 무심코 한마디 던져봤다.

 

"라헬 몸이 저렇게 생겼던가요? 체구가 작은 건 맞는데 가슴도 그렇고 허리나 엉덩이도 어찌 보면 남자같아 보이기도 하고...?"

"너무 두껍고 팽팽하게 감싸서 모르고 보시면 그렇게 보일 수 있긴 합니다. 그게 아이에 대한 아비로서 저의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입다는 차분히 말을 하다가 갑자기 칼자루에 손을 대고 억지로 눈물을 짜면서 과장된 큰 목소리로 화내는 척을 했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리 제사장이라지만 이미 죽어버린 내 딸의 육체를 욕보이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겠소! 가슴? 엉덩이? 손목을 잃고 싶다면 어디 한번 만져보시오!"

 

제사장은 미심쩍었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믿기로 했다. 그가 가진 믿음의 본질과도 통하는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잠시 의심받았던 신의 권위는 회복되었다.

 

입다는 사사가 된 후에 종종 사람을 시켜서 라헬 라파 부부와 서신으로 교류하고 경제적 지원도 해주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4명의 예쁜 딸을 더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