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모세 오경 이후부터 역대기까지 읽은 후 느낀 점

누미 2025. 1. 13. 20:08

모세 오경을 지나서 현재는 역대기까지 읽었다. 앞서 작성했던 모세 오경에 대한 글과는 달리 웃음기를 빼고 소감을 적어본다.

 

가장 뚜렷하게 반복되는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꾸만 야훼에게서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는 점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에게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끊임없이 바알이나 아세라, 아스다롯 같은 다른 신을 섬기게 된다. 그것은 마치 중력과 같아서 신이나 선지자들의 의도적인 개입이 없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신에 대한 신앙에 끌리곤 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사람들은 덕이 있는 자를 따르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떠난다. 덕을 유교가 강조하는 "인의예지신"이라는 개념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덕의 정의를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따르고 싶어하게 만드는 도덕적 경지로 보편화하더라도 그 의미가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그런 덕성을 보이는 존재에게 자연스럽게 끌리고 존경과 경외심을 품게 된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꾸 신에게서 멀어지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사실은 신이 그러한 덕성과는 거리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라는 의심을 하게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멀어지려는 본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끈질기게 배교를 하는 실수를 반복했으나 신은 자신을 믿지 않으면 가혹한 벌을 주는 방법을 통해서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을 지켜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재난이 닥치면 그것을 신의 징벌로 받아들이고 신을 다시 섬기곤 했다. 신의 덕성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숭배했다기보다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섬긴 셈이다. 그러다가도 야훼의 개입이 없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다시 바알, 아세라 등 풍요를 약속하는 인자한 신들에게 자연스럽게 끌려가곤 했다. 반면에 이후에 등장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 자체의 덕성만으로 사람들의 공감과 자발적인 신앙심을 만들어 냈다. 예수를 따르는 초기 신자들은 신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강제로 신앙을 이어간 것이 아니라 신앙을 박해하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감화되어 그를 섬겼다.

구약의 신과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을 돌아보면 광야를 떠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 제공하거나,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서 가난한 여인에게 기름이나 밀가루를 약간 준 것 같은 소소한 은혜도 있었지만 그것은 신의 무한한 권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였다. 반면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신은 해와 달의 운행을 중지시킬 정도의 극단적인 권능까지도 발휘했다.(여호수아기 10:12~14) 신이 발휘한 권능의 대부분은 파괴적인 일들 뿐이었다. 신이 이스라엘 사람을 축복할 때는 이스라엘인에게 좋은 것을 베풀기보다는 이집트인, 가나안인, 블레셋인, 아시리아인 같은 이민족을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인을 징벌할 때는 이스라엘인을 죽였다. 그리고 신이 친히 인간에게 어떤 지시를 하거나 권능을 발휘하는 사유는 일반적인 도덕의 회복이나 권장보다는 자신에 대한 인간들의 순종 여부에 대한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신의 특기는 살인과 재앙이었고 신의 개입은 행복보다는 누군가의 죽음과 불운을 의미했다. 바알과 아세라 같은 이민족의 신이 '풍요와 다산의 신'이라면 야훼는 '죽음과 재난의 신'인 셈이었다. 심지어 신으로부터 내려진 소명이 '최대한 많은 수의 블레셋인을 살해하는 것'이었던 삼손 같은 사사도 있었다. 신이 인간에게 베푼 시혜는 자신의 특기가 아닌 분야의 일이었다. 최첨단 화기들로 무장한 특공대원이 피난 중인 굶주린 아이들에게 주머니 속에서 건빵과 별사탕 몇 개를 꺼내서 주는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애초에 야훼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할 때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고 넓은 영토를 줄 것을 약속했다. 즉 아브라함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적성에 잘 맞지 않는 다산과 풍요라는 컨셉으로 약속을 했던 셈이다. 하지만 이후 유대인의 역사를 보면 그것이 잘 이행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야훼를 섬기지 않은 주변 민족들인 메소포타미아, 아나톨리아 그리고 심지어 모세 앞에서 신의 뜻에 따르기를 정면으로 거부했던 이집트가 풍요와 다산의 관점에서는 이스라엘보다 오히려 훨씬 좋은 성과를 누렸다. 차라리 "나를 믿고 섬긴다면 나의 권능으로 너의 적을 모두 살해하겠다."라고 정직하게 계약을 하는 것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스라엘인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달라져서 풍요를 약속하는 다른 신들에게 현혹되는 일이 크게 줄지 않았을까?

 

신은 전지한 존재라서 스스로도 자신이 사람들에게 매력 없는 존재라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못생기고 볼품 없거나 능력이 부족한 남자는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두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사회적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자기보다 매력적인 남자에게 그녀가 혹여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의처증 같이 비뚤어진 사랑의 병리적 형태로 악화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신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과 엮이는 것을 금지하는 여러 가지 율법들을 제시했다. 구약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너는 그 땅의 주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라... 그들이 너를 불러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할 때 네가 그들의 제물을 먹을까 하노라.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에게 아내로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따라 행음하게 하고 네 아들들도 그들의 신들을 따라 행음하게 할까 하노라."(출애굽기 34:15,16)

"그들과 혼인하지 말며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도 네 아들에게 데려오지 말라. 이는 그들이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나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것임이라..."(신명기 7:3,4)
"그들을 네 앞에서 멸한 후에 스스로 삼가라. 그들의 신들을 본받아 올무에 걸리지 말라... 그들이 자기 신들에게 행한 모든 가증한 일을 너는 행하지 말라."(신명기 12:30,31)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 앞에서 이 민족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여호수아 23:12,13)

 

스스로를 매력있는 신으로 여겼다면 자신을 따르는 백성을 늘리기 위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민족들을 포용하라는 율법을 내세웠을 수 있다. 이민족 중에도 룻기의 주인공 룻처럼 신실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신은 자신감 없이 움츠러들며 그들을 품으려 들지 않았다.


또한 신과의 계약은 불공정한 면이 있다. 인간이 계약을 위반하면 신은 인간에 대한 징벌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신이 계약을 위반하는 경우 인간은 신에게 어떠한 페널티도 가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다만 신을 떠나는 방법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렇게 하면 신은 계약 위반을 이유로 인간에게 해악을 가한다. 또한 신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짧은 생을 살뿐이라는 점도 계약의 이행 가능성을 낮추게 한다. 신이 계약에 따른 자신의 의무를 수 백 년 후에 이행한다면 계약 당사자는 어떠한 이익도 없이 신을 일방적으로 섬기기만 해야 한다.  실제의 인간은 민족이나 인류 같은 추상적인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이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개체다. 이는 언젠가 메시아가 나타나서 인류를 구원한다는 믿음이 실생활에서 발생시키는 취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먼 미래에 후손이 메시아에 의해 구원을 받든 말든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고통과 시련을 감당할 뿐이다. 계약의 상대방인 인간이 신에 대한 의심을 품을 수 없게 하려면 신은 더 부지런했어야 했다. 신은 자신을 섬기지 않는 것을 가장 심각한 악으로 여겨서 가장 가혹한 벌을 내리곤 했다. 달리 말하자면 신이라는 존재가 없어져서 아무것도 섬길 수 없게 되면 가장 큰 죄악 역시 존재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글을 쓰면서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구약의 신이 보여준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 내려고 노력해 봤으나 끝내 실패했다. 물론 신이 내려 준 율법 중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거나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는 등 따뜻한 내용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실천을 하거나 희생을 해서 베푼 것이 아니라 단지 명령에 불과하다.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독재자가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국민들에게만 착하게 살라는 지침을 내린 것과 논리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 그 악당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선언을 하거나 듣기 좋은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신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자비로운 존재인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신정론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그들은 신의 판단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심오함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은 신 혼자만의 계획이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당사자인 인간도 이해할 수 있는 해명은 필요하다. 신은 인간보다 지적인 역량이 높은 존재일 것이다. 사람이 애견과 소통할 때는 애견에게 사람의 수준에 맞출 것을 요구하지 않고 사람 자신이 개의 지적 수준과 시각에서 애견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인간이 신을 이해할 수 없다면, 신 역시 애견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만큼이라도 애정과 참을성을 발휘해서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해명을 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인간의 한계 때문에 신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은 무지에의 호소, 신비에의 호소, 입증 책임의 회피이다. 그리고 신은 반드시 선하고 현명한 존재여야만 한다는 확증 편향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막상 성경을 읽어보면 그들의 해명과 달리 신은 별로 자비롭지 않다.  신의 자비라는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괴롭히지 않음을 의미할 뿐이다. 괴롭히지 않는게 은혜란 뜻은 반대로 말하면 괴롭힘이 기본값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잘못을 깨우치고 뉘우쳐도 반드시 벌을 내린다. 특히 고약한 것은 그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 벌이 내려진다는 점이다. 평생 신에게 쓰임을 당하면서도 사소한 실수 때문에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던 모세, 황금송아지를 숭배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임을 당했음에도 그들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광야에서 고생한 이스라엘 백성들, 신에게 진심으로 빌고 회개해도 결코 어떠한 용서도 받지 못한 사울, 다윗과 밧세바의 죄에 대한 징벌로 목숨을 잃은 다윗과 밧세바의 첫째 아기, 다윗과 밧세바가 저지른 죄악의 결실인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한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 왕자("네 집안에서 칼부림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기하12:10는 암몬과 압솔롬의 죽음과 엮는 것은 비논리적임, 밧세바와의 간음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죄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 밀곰, 그모스, 아스다롯, 몰록 같은 이민족 신을 숭배했던 솔로몬에 대한 처벌을 대신 받은 솔로몬의 아들들 등등 당장 생각나는 사례들만 나열해도 이렇게 많다. 그 밖에도 다윗의 인구조사에 대한 징벌인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7만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 등등 신의 공정함이나 자비로움을 의심케 하는 예시는 그 이후 시대에도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염병, 기근, 자연재해, 외적의 침입 같은 형태로 집단에게 가해지는 신의 징벌이 얼마든지 죄 없는 자신에게도 옮겨 붙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서 신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살해하는 식으로 공동체를 정화하곤 했다. 영화 풀 메탈 재킷 전반부에서 "뚱땡이(gomer pyle)"로 불리는 훈련병 때문에 하트먼 상사에게 단체 기합을 받은 게 분했던 동료 훈련병들이 양말에 비누를 넣어서 자고 있던 그를 집단적으로 린치하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구약의 신은 보편적인 윤리관보다는 자기를 따르는지 여부를 선악을 구분하는 더 중요한 잣대로 여겼다. 예컨대 여호수아 2장에서 창녀 라합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인 여리고의 운명을 적의 손에 넘겼다. 라합은 자기 혼자 살아 남으려고 이웃과 민족을 팔아먹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라합은 다윗의 선조가 되었고 이후 천여 년이 지나서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에서 의로운 사람처럼 평가받는다.

비슷한 예로 사사기 4장 17절부터 25절에 등장하는 야엘의 사례가 있다. 야엘은 평소에 친분이 있던 적국의 장군 시스라가 자신을 숨겨달라고 찾아오자 그를 손님으로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음식을 접대한 다음에 그가 잠이 들자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말뚝을 박아서 살해한다. 비록 종교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적이지만 평소에 친분이 있던 사이였고 곤란에 빠져서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용감하게 적장을 해치웠다기보다는 자신을 믿고 의지한 사람을 속여서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나쁘게 보자면 야엘은 처단 받아 마땅한 악한 자와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사가 본래 모순의 연속이라지만 그것이 과연 의로운 행동으로 추앙받기만 할 만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 사사기 5장 24절에서 신이 보낸 천사가 야엘을 가장 많은 복을 받을 여자라고 축복한다. 그녀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방해했던 요소를 제거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은 그다지 보편적인 선을 추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척 예민하고 가혹한 성격이다. 그는 다윗과 밧세바를 징벌하기 위해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아닌 그들의 아기를 "쳤다." 신의 손길에 얻어맞은 아기는 죽었다.

그밖에 대표적으로 사사기 11장의 '입다'라는 장군의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는 암몬인과의 전투를 앞두고 승리를 하기만 하면 개선할 때 가장 먼저 자신을 맞이한 사람을 인신공양 하겠다고 신에게 서원한다.(사사기 11:30,31) 그는 전투에서 승리했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의 딸이 강아지가 오랜만에 재회한 주인을 반기듯 뛰어나와 반갑게 아버지를 맞이한다. 그렇게 입다의 딸은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실컷 울게라도 해달라고 하면서 친구들과 산에 들어가서 두 달 동안 울었다. 입다의 딸은 혹여 자신도 아브라함이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이삭처럼 구원의 기회가 있을까, 신의 자비로운 처분이 있을까라는 헛된 희망을 가졌지도 모른다. 신은 두 달이나 지속되었던 그녀의 슬픔과 극심한 두려움을 끝내 외면하고 기어코 죄 없고 순결한 그녀를 산 제물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몹시 탐이 났었는지 자기가 만든 규칙도(신명기12:31, 18:10) 안 지킨다. 이후 이스라엘 처녀들은 해마다 나흘 동안 산에 들어가서 울면서 입다의 딸을 추모했다.(사사기 11:34~40)

 

그런 성격을 보여주는 가장 어이없고 모욕적인 사례는 사무엘하 6장에 나타난다. 성궤를 옮기는 상황에서 성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려고 하자 웃사라는 사람이 성궤를 잡아서 떨어지지 않게 했다. 신은 성궤를 만졌다는 이유로 그를 벌레처럼 쳐 죽인다.(사무엘기하 6:6,7) 신학적 관점에서라면 모르겠지만 도덕적 관점에서 웃사는 죄인이라기보다는 의인이었다. 그가 잡지 않았다면 성궤를 땅바닥에 떨어뜨린 죄로 수십 혹은 수백명의 사람의 목숨이 피에 굶주린 신의 손에 의해서 사라질 뻔 했다. 비슷한 사례로, 신은 단지 의전상 문제로 자신의 충실한 종 아론의 두 아들을 불길로 잡아먹기까지 했다.(레위기10:1,2) 자기 아들이 그것도 두 명이나 겨우 그 정도 일로 살해될 미래를 알았다면 아론이 이집트에서 나오려고 했을까? 두가지 사례 모두 두 세마디로 타이르거나 가벼운 꿀밤 한대 정도면 고쳐질 일이었다. 신의 이러한 기행은 코즈믹 호러를 연상시킨다.

 

스스로 선택으로 크툴루 신화의 세계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어리석은 조상 아브라함을 둔 죄로 후손들의 고난이 컸다. 그보다 약간 똑똑했던 조카, 롯처럼 쎄한 느낌이 들었을 때 그는 바로 손절을 쳤어야 했다. 그는 롯이 겪은 비극을 옆에서 보기도 했고 할례를 요구받거나 이삭을 바치라거나 위험 징후는 분명히 있었다. 이런 가혹한 행위들에 대해 신은 반드시 옳아야 한다는 확증 편향에 빠진 사람들은 이를 "사랑의 매"라는 정신 나간 명분을 대기도 한다. 사랑의 매로 이마에 권총을 발사한다면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떤 교육 효과가 생길까? 힌트: 뇌가 파괴됨.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솔로몬이 아무 생각없이 겨우 여자들 꼬드김으로 우상을 숭배했을리 없다. 어쩌면 그는 어린 시절 웃사의 죽음에 트라우마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친형이 신생아 때 신에게 "사랑의 매"인 꿀밤을 맞고 사망했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신이 다윗에게 인구조사를 명령한걸 다윗이 했다는 이유로 신이 전염병이 일으켜서 수많은 백성이 죽는 모습을 보고 분노했을 수도 있다. 문장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될 것처럼 보이는 부조리지만 엄연한 사실이었다. 현명한 솔로몬은 불쌍한 후손들을 코즈믹 호러 세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신과 거리를 두면서 차차 종교를 바꾸고자 했을 수 있다. 만약 실제로 그랬다면 그는 신으로부터 받은 지혜를 가장 지혜롭게 사용했던 셈이다. 현명함의 대명사인 솔로몬의 대표적인 일화인, '아이를 잘라서 분쟁중인 두 어머니에게 나눠주자는 재판'은 그가 가진 지혜의 1%도 보여주지 못한 사례에 불과했다. 그는 신이 사랑했던,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리고 압도적인 두뇌로 신에게서 거리를 둬도 자기 대에서는 해악를 당하지 않고 오히려 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어낼만한 절묘한 스위트 스팟을 찾았다. 불공정 계약에 당한 어리석은 조상 아브라함과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 가장 지혜로운 후손 솔로몬의 상반된 행보라 할만하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 현명한 솔로몬의 유산을 제대로 계승할 능력이 부족했고 그대로 파멸해버렸다.

 

욥은 신앙이 깊은 사람이고 신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신에 대한 신앙을 이어가지 않았다. 잔혹한 구약의 신에게서 후손들을 무사히 탈출시킨 욥을 인터뷰해보자. 물론 내가 상상한 것이다.

 

나는 하느님을 경배하네. 그분은 나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신 후에 2배로 되돌려주셨지. 정말 은혜로우신 분이야. 내 딸 사라, 요안나, 마리아를 압사시키시고서 훨씬 더 예쁜 여미마, 긋시아, 게렌합북으로 보상해주셨지. 나는 많은 재산과 예쁜 딸들이 생겨서 너무 기쁘다네. 젖니가 빠진 걸 재미있어하던 내 막내딸 마리아의 마지막 모습이 갑자기 생각나는군. 그 아이는 무너진 나무 기둥에 깔려서 컥컥 소리를 내면서 울었어. 나를 보면서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는데 그 아이 목이 짓눌렸는지 그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어. 입술 모양을 봐서는 아마도 "아빠 살려주세요" 였던것 같아. 나는 죽기 살기로 기둥을 들어올렸어. 그 때 다친 내 어깨 인대는 아직도 회복되질 않고 있지. 그리고 의사에게 가려고 마리아를 들쳐 업었지. 하지만 그 아이는 입으로 피를 토해내더니 숨을 쉬지 않았어. 차라리 내가 죽는게 나을거라고 느끼면서 비명을 질렀어. 사라는 시신 자체를 찾지 못했고 요안나는 다행히 머리를 맞고 즉사해서 고통 없이 갔더군.  하지만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야. 나는 여미마, 긋시아, 게렌합북을 받았잖아. 하하하하하. 내가 이렇게 하느님이 아이들을 새로 주신 것에 대해 기뻐하고 주기적으로 감사를 표해야 먼저 간 내 딸 사라, 요안나, 마리아를 하느님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자애롭게 보살펴주실거야.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하느님을 반드시 충실하게 경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어. 너희의 신앙심이 하느님의 의심을 살 정도로 애매하다면 너희는 언제든지 너희의 죽은 언니, 오빠, 형, 누나들 같이 하느님이 하시는 시험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지.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재빨리 모래 바닥 위에 이런 글자들을 급하게 휘갈겨 쓴 후에 곧바로 문질러서 지워버린다)

"사실은 이런 방법을 써서 그 미친 신으로부터 도망치라고 가르치지."

 

이렇듯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던 구약의 신은 도덕적 관점에서는 같은 시대인 bc 13세기에 존재했던 타 종교의 망나니 같은 신, 제우스에 비해 특별히 고결한 존재로 볼만한 문헌적 근거는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제우스는 인간적인 매력이라도 있고 옹졸한 야훼와 달리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빌면 받아주기는 할 것 같은 호탕한 이미지다. 다만 야훼 신앙은 종교의 실체를 유지하면서 오래 살아남았고 이후에 예수의 희생과 함께 성숙하고 고결한 교리로 발전되어 사람들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중과 숭배를 받게 되었을 뿐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전도자들은 예수의 고매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전파하기보다는 징벌과 잔혹함을 강조하는 구약과 요한계시록을 악용한 공포 마케팅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하고 싶으면 ~하라, 또는 ~하고 싶지 않으면 ~하라라는 조건을 내세운 믿음을 권유하는 셈이다. 그러나 신앙이란 논리가 아닌 이끌림의 영역이다. 이미 현대적 자유와 평등, 개인의 책임에 익숙해진 계몽된 사람들에게 성경 구절을 그런 식으로 악용하여 위협하는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은 그런 협박을 유치하다고 여기면서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두려움 때문에 신앙을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틈만 나면 신에게서 떠나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 같은 처지가 될 뿐이다. 물론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소설 1984의 윈스턴도 전지전능한 빅브라더를 결국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르고 싶게 만드는 덕과 매력이다. 구약 시대와는 달리 불신자들에 대한 신의 징벌도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해악의 고지보다는 이끌림과 감화가 훨씬 적합성 높은 전도 방법일 것이다.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는 점과 상대의 악의에 대해서도 선의로 대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은식기를 훔친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내어준 미리엘 신부를 예로 들 수 있다. 불신자를 신앙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는 이렇게 사랑과 희생을 보여준 예수의 길을 전도자가 스스로 따르는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느끼게 함이 효과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