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초기 불교와 유식 불교의 윤회관에 대한 나의 해석

누미 2024. 12. 14. 07:11

1. 초기 불교에서 다룬 업의 소멸과 해탈의 의미.

초기 불교의 무아론은 간명했다.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오온이 조합되어 내가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죽으면 오온은  분해되어 흩어진다. 그리고 내가 지은 업에 의한 연기로 다시 오온이 생성되고 합쳐져서 다른 생명이 만들어지는 형태로 윤회가 일어난다. 엄밀히 말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윤회한 새 생명은 나와는 별개의 자아다. 그가 겪을 고통을 내가 경험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무아론과 윤회는 상호 모순적으로 보인다. 석가모니는 윤회는 받아들였지만 내세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후대 사람들은 그가 형이상학적인 논쟁을 피한다든지 불필요한 번뇌를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해설을 하곤 했지만 나의 생각은 다소 다르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이 창시한  무아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내세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은 필연적으로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을 전제하게 되는데, 이는 무아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석가모니는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리고 무아론의 핵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내세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했을 것이다.

해탈의 1차적인 효과는 현세의 내가 현실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2차적인 효과인 윤회를 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흔히 생각하기에 끝없이 이어지는 윤회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탈출하는 것이 해탈이다. 그러나 윤회를 통해 태어난 내세의 생명체가 나랑 다른 자아라면 내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다음 생에 윤회할, 나 아닌 존재가 겪는 고통을 미래의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음 생을 윤회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미래의 내가 겪게 될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내가 남긴 카르마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 그 새로운 존재에 대한 책임감 혹은 연민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초기 불교의 관점과 순수한 무아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다음 생을 위한 해탈은 엄밀히 말해 ‘남의 일’, 즉 나의 업을 이어받은 나와는 다른 존재의 일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절실하지는 않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윤회의 단절을 미래적인 관점에서만 볼 필요는 없다. 윤회를 인정한다면 현세에서 별다른 업을 쌓지 않은 사람의 고통을 설명할 수 있다. 전생에 내가 아닌 다른 자아가 쌓은 업을 내가 이어받아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현세의 내가 수행을 통해 그 업을 소멸하는 것은 전생의 존재가 일으킨 윤회로부터 현재의 내가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무아의 관점에서 해탈이란 미래에도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욕구보다는 과거에 만들어진 업으로 야기된 고통을 끊어내겠다는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하여 초기 불교는 무아와 모순될 수 있는 윤회를 중요한 요소로 인정하면서도 그로 인해 염세주의로 빠지지 않고 과거의 업의 해소를 다음 생으로 미루지 않고 현재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보는 현세 지향적인 교리를 가지게 된다. 윤회로부터 발생한 그러한 고통을 현세에 모두 해소하지 못하면 오온의 일시적 연기로 이루어진 나는 결과적으로 고통만 당하다가 소멸하는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너에게 모여있는 업이 너무 많으니 이번 생에는 수드라 탈출부터 하고 다음 생들에는 열 번에 나눠서 크샤트리아까지 진입해 보자 그렇게 업을 덜어내고 조금씩 승진하다 보면 언젠가 해탈을 이룰 수 있을 거야”라는 교리라면 사람들은 “이번 생은 힘드니까 내세에서나 해야지”라고 회피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과거 때문에 고통받을래? 당장 일어나. 수행해. 내가 방법도 가르쳐줄게 어렵지 않아. 중도, 팔정도를 지키며 살아.”라는 메시지를 중생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해탈은 중생들에게 미룰 수 없는 현세의 과제가 된다.



2. 유식 불교의 윤회

유식 불교에서는 업이 저장되는 공간인 아뢰야식을 고안했다. 이는 전생의 업에 대해서는 다루면서도 내세로의 윤회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보여 온 초기불교의 무아론과는 다소 결을 달리 한다. 불교가 인도에서 오랜 세월 지속되면서 인도인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흐르는 힌두교와 브라만교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유식 불교가 7식인 말나식과 8식인 아뢰야식을 도입한 것은 윤회와 아트만의 침입에서 무아론을 지켜내기 위한 타협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 세계관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를 이루던 오온(五蘊)은 흩어진다. 물질적 요소인 색(色)은 분해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정신적 요소인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은 죽음과 함께 각각 흩어져 그 작용을 멈춘다. 죽음은 오온이 흩어져 '나'라고 할 만한 것이 남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업은 오온 전체에 스며들어 업의 영향을 연결하고 인과를 일으킨다. 사람이 죽으면 오온이 완전히 흩어지지만, 오온에 스며든 업의 잠재력은 연기 작용에 의해 새로운 오온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 새롭게 만들어진 오온의 인연에 의해 생명이 만들어진다.

한편 유식학은 초기 불교의 오온을 구성하는 6식에 말나식, 아뢰야식이 더하여 8식을 주장한다. 유식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오온이 흩어지면 완전히 소멸해 버린다. 그리고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나'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작용에 의하여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가 발현하여 새로운 오온을 형성한다. 형성된 오온은 연기에 따라서 결합이 일어나고 새 생명이 만들어진다. 말나식은 '나'에 대한 집착을 통해 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이 발현되도록 촉진하여 윤회의 원동력이 된다. 아뢰야식은 업이 보존되는 심층 의식이다. 재미있는 점은 오온의 모든 구성 요소는 사람의 죽음과 함께 모두 분해되고 소멸하는데 이 두 가지 식만이 예외라는 점이다. 즉 안식 이식 비식 등 기존 이론의 6식은 죽음과 동시에 분해되는데 말나식, 아뢰야식은 죽음과 상관없이 잔존하여 독자적으로 기능을 발휘한다. 이는 7, 8식이 오온의 구성 요소라기보다 오온 플러스 알파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트만과 다른 점은 그 자체로서 독자적인 영혼이 아니라 저장소일 뿐이란 점과 아트만처럼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업과 연기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유식 불교에서 도입한 이 두 가지 식의 개념은 무아를 위해 아트만을 부정해야만 하면서도 업의 승계 과정에 대한 아트만의 명확한 설명력을 차용하고 싶은 타협안이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아뢰야식의 업 저장 기능과 죽음 이후 그 업을 이용한 새로운 오온의 생성 기능 때문에 유식 불교의 윤회에는 초기불교의 철저한 무아론과는 달리 어느 정도 개체적 연속성이 생긴다. 비록 나의 실체는 무아이지만 죽음에도 불구하고 분해되지 않고 기능하는 아뢰야식과 말나식이 죽음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새로운 오온을 발생시켜 새로운 생명을 형성하는 코어 역할을 하여 동일한 이어짐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여섯 가지 식과 달리, 아뢰야식은 죽음 이후에도 분해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계속 기능한다. 이처럼 죽음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를 통해 현세의 업이 내세로 이어지기에, 초기 불교와 달리 내세의 삶을 남의 일처럼 간과할 수 없게 된다.

동아시아에 자리 잡은 불교는 유식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유식 사상은 윤회의 과정을 보다 정밀하게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석가모니가 극복하고자 했던 내세에 대한 염려로 인한 번뇌를 다시 끌어들인 듯한 부작용도 있다는 양면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