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예수의 희생과 부활에 대한 나의 관점

누미 2024. 11. 25. 17:31

이 글은 어제 쓴 글과 마찬가지로 내 지식과 깨달음에 발전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번복할 준비가 되어있는 잡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얼핏 보기에는 모순적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해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여 자신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희생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은 이렇게 반응할 수 있다.

“희생이라고? 부활했잖아. 아팠던 건 이해하겠지만 고대 사회에서 그 정도 고통을 당하고 죽은 죄수들은 흔했을 텐데 무슨 유난이 그렇게 심해? 고통의 강도로 따지자면 중국의 능지형이나 바이킹의 피의 독수리처럼 말로만 들어도 괴로울 정도의 극단적인 형벌에 비하면 십자가형은 오히려 양호한 편이잖아? 그리고 고통보다 중요한 건 죽음이잖아. 죽음은 영원한 존재의 소멸이라 엄청난 희생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는 3일간 잘 자다가 깨어난 거잖아? 죽었으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으니 예수의 주관적 관점에서 본다면 그 3일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처럼 느껴졌을 거야. 마치 전신마취 수술을 받은 환자처럼 말이야. 손발에 못 박히고 매달려있느라 몇 시간 아팠던 건 이해하는데 그걸로 생색내는 정도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여기는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네가 뭐라고 하든 간섭은 않겠지만 솔직히 공감은 못하겠다. “

이러한 삐딱한 시선의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기존의 선교 방식이 지나치게 예수의 죽음이나 육체적 고통이라는 현상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소 유치해 보일 수 있다. 거칠게 보면 신앙의 논리 구조가 이렇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우리 하느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알아?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야.

2.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어.

3. 살아났다면서 목숨을 버렸다니까 좀 모순적인것 같군. 앞 뒤 안따지고 떠벌이면서 자랑하다가 전체 그림이 어긋났어. 어쩌지? 유레카!! 자꾸 따지는 놈들은 전부 잡아다가 불태워버리면 돼.

 

하지만 신앙인들은 실제로 저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비신자의 관점에서 기존의 신학적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내용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를 지키면서 ‘어차피 나중에 부활해 버린’ 예수의 죽음이 왜 인류를 위한 희생이고 사랑이었는지에 대한 보다 설득력 있는 관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예수의 진정한 고통은 손과 발을 뚫린 채로 고통스럽게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나 창으로 옆구리를 찔린 것,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채찍으로 무자비하게 맞은 것이 아니었다. 가장 큰 고통은 인류의 죄를 3일 동안 대신 짊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성부와의 연결이 끊긴 상태로 고독하게 3일 동안 그 죄악들과 사투하면서 감당해야 했다. 그것이 희생의 진정한 의미였다.

부활의 원리는 이렇다. 예수는 항상 성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십자가와 함께 인류의 죄를 짊어지게 되었다.(베드로전서 2:24) 신은 죄를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원칙(이사야 59:2, 하박국 1:13)을 고수해야 했다. 그래서 성부는 인류가 저지른 거대한 죄에 절여져 악취를 풍기는 예수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성부는 예수를 버리게 되고(마태복음 27장 46절) 예수는 그로 인해서 고독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린도후서 5:21, 갈라디아서 3:13) 인류의 모든 죄가 마침내 예수에게 모두 대속되자 예수는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라고 말하고 성부와의 연결이 끊겨 숨을 거둔다. 예수에게 붙어있던 죄는 3일 동안 예수의 안에서 소멸되고 아무런 죄도 남아있지 않게 되자 성부는 다시 예수와 접촉하게 된다. 구약의 신은 가끔씩 부담 없는 소소한 은총을 베풀거나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했지만 그 사랑을 자신의 희생으로 증명해 낸 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을 실현했다. 성부와 다시 연결되면서 예수는 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과 희생을 실제로 증명해 낸 전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는 인류의 죄를 몸소 체험하면서 인간에 대하여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것이 부활의 의미이다.

이렇게 부활은 죄의 소멸의 의미한다. 모든 죄의 대속이 완료된 순간 예수는 숨을 거두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영혼에서 죄가 떨어져 나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죄의 소멸은 예수의 죽음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부활하기까지 3일간 예수의 고독한 사투의 결과였다. 그 매커니즘이 무엇이었는지는 성경에는 알려져 있지 않아서 약간의 상상과 추론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연가시는 숙주인 곤충의 몸 안에 살면서 곤충을 조종하여 죽음의 길로 유도하는데 숙주인 곤충의 몸에서 빠져나오면 생존할 수 없다. 죄악은 오염되기 쉬운 인간의 영혼을 잠식해 인간을 조종하여 지옥으로 이끈다. 예수의 대속에 의해 죄악은 강제로 인간의 영혼에서 끌려 나와 청정한 예수의 영혼에 자리 잡게 된다. 죄악은 숙주를 잃은 연가시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라는 적절한 생육 환경을 잃고 예수의 영혼 안에서 정화되고 사멸한다. 개연성과 합리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은 근거 없는 상상과 추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원리가 아니라 예수가 인류를 위해서 그런 험난한 과정을 기꺼이 감내했다는 점이다.

십자가형이라는 처형 방식은 비록 가혹했지만 그것이 예수가 겪었던 고통의 핵심은 아니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형이 아닌 아편 과다 투여 같은 안락사 방식의 처형을 당했더라도 어차피 예수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성부와의 연결이 끊어진 채로 인류가 저지른 죄악과 사투해야 했다. 그런 고독한 영적 수난 자체가 육체의 통증에 불과한 십자가형보다 훨씬 큰 고통이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의 죽음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였든 인류를 위한 틀림없는 거대한 희생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대속은 성경을 믿는 사람만 받아들이는 신앙의 영역이다.(마태복음 20:28, 요한복음 1:29, 로마서 3:25, 히브리서 9:12~14, 고린도후서 5:21)

만약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이 있잖아. 예수는 당시 다수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려서 처형당한 것일 뿐이었어. 십자가에 매달린 이유는 인류의 죄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에 의한 인과였을 뿐이지. 기왕 처형을 당하는 김에 인류의 죄까지 가져갔다고?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구나.”
라는 식의 반론을 펼친다면 그에 대응하기는 매우 어렵다. 위의 성경 구절들을 제시하면서 반박해봤자 상대는 성경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전혀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경 밖에서 납득할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예컨대 예수가 죽은 해인 AD 33년을 기점으로 죄의 대속과 소멸에 따른 범죄율 변화 또는 이전과 이후의 임산부가 겪는 출산의 고통 같은 것을 비교하는 등 비신자도 납득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쉽지 않은 길이다.

이 글은 예수의 희생에 대한 몇 가지 의문 중에서 일부를 성경의 내부적 논리를 활용하여 탐구했을 뿐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성경의 내용을 부정하며 펼치는 공격에 대해서 성경 구절을 대면서 방어하는 것은 순환 논증에 불과하다. 따라서 성경 자체를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희생과 사랑을 말로써 이해시키기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