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모세 오경을 읽고 느낀 신에 대한 나의 추측과 평가

누미 2024. 11. 24. 15:03

얼마 전부터 틈틈이 성경을 읽고 있다. 모세 오경까지 봤는데 나 나름대로 할 말이 생겼다. 성경 전체를 읽는 데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스스로의 무식에 대한 걱정이 없진 않지만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성경 완독할 때까지 억누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이런 모자라고 어리석은 이야기를 남겨본다.

 

 

1. 머리말: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자유의지를 부여한 이유


신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한 이유는 심심함 때문인 것 같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논증 내용이 A4 2장 정도에 달해서 글의 도입부에 배치하는게 적절치 않았다. 글 서두에 진입 장벽을 놓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부록으로 분리해둔다. 신의 심심함 논증에 집착한 이유는 이 글 전반에 흐르는 전제는 신의 심심함과 재미 추구이기 때문이다. 나름 면밀한 검토를 거쳐 내린 결론이지만 심심함 때문에 인간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엄연히 하나의 가설일 뿐이긴 하다. 별 생각 없이 마침 눈 앞에 적당한 흙이 있어서 만들었을 수도 있고, 심심함을 느껴서가 아니라 5일 간 노력해서 거의 완성된 세상을 보고는 뭔가 밋밋해서 포인트를 줄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만들었을 수도 있다. 신의 의도에 대해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데도 넘겨짚는건 그 논리가 무엇이든 비약일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건 신의 심심함이라는 나의 관점뿐만 아니라 기존 신학들 역시 자유롭지 못한 문제이기도 하다.

 

리만가설은 아직 연역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반례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리만가설이 사실이라는 전제로 다른 많은 이론들이 정립되었고 그것들은 현실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와 같은 원리로 나는 심심함을 유력한 원인으로 가정하고 생각을 이어가봤는데 별다른 자체 모순나 반례라고 할만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심심함 이론은 성경에서 종종 발견되는, 신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적들, "신이 굳이 왜 그런 일을 했을까?"라는 의문들에 대해 기존 신학에 비해 억지스럽지 않은 설명을 할 수 있었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만든 이유가 심심함이라는 추측이 진실인지 여부를 확증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설득력 있는 가설이라는 전제로 논리를 전개해보겠다.

 

심심함 때문이든 신만이 아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든 그렇게 인간을 만들고 나니까 인간을 만들기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된 것 같다. 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면 외로움이란 개념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이 외로울까봐 하와를 만들어 준 것은 신이 느낀 외로움을 아담에게 투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외로웠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로 애정을 갈구한 것 같다. 그러다가 인간이 자신을 만족스러울 만큼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죽이거나 벌하곤 했다. 그는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그는 인간에 대해서 잘 몰라서 사람을 다루는데 서툴렀고 그런 식으로라도 인간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만들었으면서 친구처럼 지내기까지 했었던 아담의 후손을 잃었고 노아와의 언약 역시 그 후손들로부터 쉽게 잊혀져 버렸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후손도 잃을 뻔했지만 롯, 이스마엘, 에서를 놓치면서도 끊임없는 집착과 개입 끝에 겨우 손자인 야곱(이스라엘)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숭배와 섬김을 겨우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포커를 칠 때 상대의 패를 모두 안다면 돈을 모두 딸 수는 있겠지만 게임하는 재미를 잃을 것이다. 신이 인간의 모든 행동이 예측 가능하면 인간과 함께 노는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자유 의지를 부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부터 신의 속성인 전지전능 중에서 전지함은 신의 뜻에 의하여 스스로 억제된다. 전지함과 자유 의지의 충돌에 대한 논증도 "심심함 논증"처럼 부록으로 뺀다. 또다른 예시를 들자면, 관객 없이 혼자 하는 퍼펫 인형극이 얼마나 지루할지를 떠올려봐도 좋다. 신이 자신의 왼손으로 퍼펫 인형의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하면서 오른손에 끼운 인형에게 "우리는 하느님을 섬겨야 해"라고 복화술을 쓰는 모습은 참 쓸쓸해 보일 것 같다.

 

그러나 신은 그런 궁상을 떠는 대신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다. 신에게 받은 자유의지로 인간이 저지른 행동은 신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좌충우돌이었다. 망할 놈의 인간들은 선악과를 따 먹기도 했고 신의 편애를 이유로 동생(아벨)을 죽이기도 했고 신이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게 타락해서 홍수를 일으키게 하기도 했다. 게다가 건방지게 바벨탑을 만들기까지 했다. 다만 만약 바벨탑이 신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신을 숭배하기 위해 온 인류가 힘을 모아서 지은 신전이었다면 그가 성을 내기 보다는 오히려 기쁨에 몸 둘 바 몰라하며 황홀해했을 것 같다. 실제로 3대에 거친 끈질긴 구애 끝에 야곱 가문의 자유의지에 의해 절대적인 복종을 얻어냈을 때 신은 얼마나 기뻤을까?

 

 

2. 하와 이야기 : 놀이의 판을 키우게 된 신

 

신이 부여했다는 자유 의지를 최초로 실행했던 당사자 하와의 입장도 들어보자. 물론 내가 상상한 것이다.

 

왜 선악과를 먹어서 이런 말썽을 일으켰느냐고요? 저는 공허했어요. 저의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아담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였을까요? 하느님의 창작욕을 충족시킨 인형이었을까요? 맨날 똑같은 일만 반복되는 에덴동산이 편하긴 했어요. 하지만 제가 얼마나 오래 전부터 그 곳에서 지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아요. 저는 그게 영겁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런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삶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된다는 게 숨이 막혔어요. 그런데 하느님이 선악과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셨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요.

저는 솔깃했어요.

'죽는다고? 바라던 바네.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아담도 이런 삶에서 해방시켜주자.'

 

하지만 저는 당장 그러질 못했어요. 애정을 받으면서도 죽음을 갈구하는 제 마음을 알면 하느님이 얼마나 상심하셨을까요? 저는 그 삶이 지겹고 허무했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제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차마 먹지 못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뱀이 나타났어요. 뱀은 저를 유혹했죠. 뱀은 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선악을 알게 되지만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고맙게도 저에게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긴 거였어요. 비록 그때는 지금보단 순진했지만 그래도 저는 하느님의 모습을 본따서 만들어진 하느님의 딸 같은 존재예요. 미물인 뱀이 하는 얕은 거짓말 따위에 순순히 넘어갈 리 없잖아요? 저는 당연히 뱀보단 하느님을 믿었어요. 반드시 죽을 것이었죠. 그러나 저는 그깟 뱀의 유혹 따위에 넘어가는 어리석은 여자인 척 하면서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먹였어요. 그이의 공허한 눈빛을 보니 그도 내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어요.

 

선악과를 먹고 나니 영생이 사라졌다는 점이 직감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리고 성적인 욕구가 생겨났죠. 죽는 존재는 후손을 만들기 때문인가 봐요. 그이의 몸이 전과는 확실히 다르게 보였는데 처음 경험해 본 이질적이고 설레면서 웬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었어요. 가슴이 콩닥 콩닥 거렸어요. 심장이 가슴에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이었죠. 아담 역시 저와 마찬가지였어요. 다만 그이는 저와는 달리 자신의 신체에 눈에 확 띄는 특별한 변화 때문에 어쩔 줄 몰라했어요. 무화과 잎으로 가려보겠다고 혼자서 허둥대는 모습이 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도움을 줬죠. 그렇게 저도 같이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었어요. 정말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던 날이었고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져요. 그런데 그 큰 게 겨우 무화과 잎으로 가려지겠어요? 하느님께 당연히 들켰죠. 그러더니 죽기 위해서 그걸 먹었다는 제 속내를 모르신 척하고 눈감아 주신 건지 정말로 모르셨던 건지 다행히 하느님은 슬퍼하시기보다는 화를 내시더군요. 그 분에게 슬픔을 드린 게 아니라서 지금도 저는 그 때의 제 결정에 만족해요.

 

아담은 그때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하며 제 탓으로 돌렸어요.

"하느님께서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좀 섭섭했지만 그를 이해해요. 딱히 틀린말은 아니었으니까요. 나중에 물어보니 그이는 저처럼 충분한 각오를 해왔던 건 아니었다고 하더라고요. 인자하신 모습만 보이시던 하느님이 화내시는 모습을 처음 보니 온몸이 얼어붙었고 아무 말이나 하게 되었고 그냥 그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요. 뱀도 저희와 같이 벌을 받았어요. 거짓인 걸 뻔히 다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 약간 미안하기는 했지만 자업자득이죠. 어쨌든 뱀은 저를 속여서 곤란에 빠뜨리려고 한 거잖아요. 나중에 뱀에게 정확한 사정을 말해주니 뱀은 저를 더 미워하게 되었어요. 저도 뱀이 싫어요.

 

그건 그렇고 선악과를 먹으면 곧 죽는 줄 알았는데 그 후에도 꽤 오래, 몇 백 년을 더 살게 된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쫒겨나게 될 줄도 몰랐죠. 기대하지 않았던 변화가 두려웠지만 그래도 홀가분했어요. 그렇게 저희 부부는 에덴동산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얻고 그 대가인 시련을 감당하게 되었어요.

시련은 예상했던것 보다 훨씬 가혹했었죠. 그 중에서 가장 큰 시련은 큰 아이가 자기 동생을 죽이고서 우리 곁을 떠나버린 일이었어요. 차라리 의미없던 과거의 삶을 영원히 연명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들 정도였었죠. 그 날만큼은 하느님께서도 직접 죄인인 저를 위로해주시며 또다른 아이를 가지게 해 주셨어요.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제 아이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 솔직히 두려워요.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저희는 어떻게든 살아갈테고 하느님이 저희를 버리시진 않을테니까.

 

신의 입장도 상상해보자. 신은 하와가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감과 무의미감을 느꼈다는 점에 처음엔 당황했을 수도 있다. 자신은 오직 하와의 행복만을 위해서 일했는데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일 것이다. 그에게는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에 대한 데이터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슬퍼할까봐 그런 마음을 힘겹게 숨기려 하는 하와의 효심을 기특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딸, 하와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떠벌이길 좋아하는 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고 오히려 현명해진다는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정보를 교묘하게 흘린다. 뱀은 그 정보를 접하고서 선악과를 먹고 싶어졌지만 의심이 들어서 정말 죽지 않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효과와 안전성이 검증되면 자기도 먹을 생각으로 하와에게 선악과를 권한다. 그렇게 하와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는다.

 

이런 과정들은 신의 입장에서는 예측 불가라는 의외성을 느끼게 해주는 이벤트였고 그는 창조 덕분에 꽤나 흥미 넘치는 경험을 했던 셈이었을 것 같다. 신은 슬픔을 보이는 대신에 과도하게 화내는 모습을 소중한 하와에게 선물한다. 그러면서 놀이의 무대를 에덴동산 바깥의 더 넓은 곳으로 옮겨서 판을 더 키워보기로 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뱀의 입장도 들어보자. "씨발, 내 다리 돌려줘요. 거짓말은 하느님이 하고 왜 날 벌줘요? 나빠요. 하와 년도 마찬가지야. 다음에 그 년이나 자식들하고 마주치면 발꿈치를 콱 물어버릴거야."

 

 

3. 신은 선량할까?

 

전지함과 자유 의지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 쯤에서 멈추고 전능함과 신의 선함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생각해보겠다.

 

신의 전능함 역시 크게 의심스럽다. 신이 전능했다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인을 살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모세나 70인의 장로들처럼 신과 직접 소통한 인간들은 절대로 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신을 영접한 인간은 잊을 수 없는 영적 고양감을 경험했고 그들의 확고한 믿음은 절대로 흔들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인들과 직접 소통을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것인지 하지 못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소수의 대표자와만 소통하여 자신은 인간들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나머지 대부분의 인간들을 차별했다. 신이 전능한데도 그렇게 처신했다면 그의 선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 제시했던 재미의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권능이라는 치트키의 과도한 사용이 게임의 재미를 저하하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하려 했다고 상상해 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신이 선한 존재라는 점은 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확증 편향에 빠져서 도출한 것(신학적 추론)에 불과할 뿐 합리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착하다 라고 주장한다고 그가 착한 사람인 것은 아니고 납득할만한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데 신의 선의에 대한 근거는 다분히 순환 논증적이다. 신이 선의를 가졌을 것이라는 전제는 불가항력 앞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희망과 그에 따른 확증 편향 같아 보인다.

어쨌든 신도 나름대로의 어떤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처신했을 것이다. 그게 앞서 상상했던 재미 때문이든, 인간이 짐작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어떠한 이유 때문이든, 그 무엇이 되었든... 신을 옹호하는 사람은 그것을 신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한 목적이라고 둘러대기도 한다. 신 자신의 영광을 드높이는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킨 것이다보니 NPD(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연상된다.

성경 전문가에 의하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인은 60만명 정도였고 구약의 기록에 따르면 광야를 떠도는 기간 중에 신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의 수는 41,700명 플러스 알파(알파는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되지 않은 사망자로 절대로 적은 수는 아님)이다. 대략적으로 10퍼센트에 가까운 이스라엘인이 신에게 직접적인 죽임을 당한 셈이다. 그러한 가혹한 대규모 살인들이 신이 계획한 어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면 그는 사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혹자는 그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을 정화하고 민족의 전체적인 영성을 높였다는 식의 옹호를 한다. 이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시하는 전체주의적인 발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형적인 악행이다.


신이 보여준 행동 패턴은 NPD와 유사한 점이 많다.


1). 자기중심성 및 과대성 및 칭찬과 인정에 대한 욕구.

NPD 환자는 과도한 자기 중심성과 과대성을 보이며, 자신이 특별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들은 끊임없이 칭찬과 존경을 요구한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끊임없는 칭찬과 주목을 필요로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모세 오경의 신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설정하며, 모든 피조물이 자신을 예배하도록 요구한다. 예를 들어,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출애굽기 20:5)와 같은 구절은 자신의 권위와 중심성을 강조한다. 또한 신은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을 요구한다(예: 신명기 6:13). 이러한 행동은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해석될 수 있다.


2). 공감 부족 및 분노와 처벌

NPD 환자는 자신의 자존감이 위협받거나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 극도의 분노를 표출하며, 이를 통해 자신을 방어하려 한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이나 필요를 인식하거나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하며, 종종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여긴다.

 

모세 오경의 신은 자신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들에게 종종 가혹한 처벌을 내린다(예: 홍수 심판, 소돔과 고모라 멸망). 이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보다는 자신의 정의와 권위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 그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를 수시로 보여왔다. 성경의 다른 파트들에서도 종종 선지자들에게 "너는 나의 도구"라는 식의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차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예수 시대에 이르러서도 못된 버릇을 완전히 고치지는 못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입을 통해 신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않는 사람을 짜지 않은 소금에 비유하여 바닥에 버려져서 밟힐 것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는 사도들의 책임감을 깨우치기 위한 언행일 수 있지만 사도들을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보는 유구한 기존의 시각을 다시 드러낸 것이다. 소금 입장에서는 잠시 예쁜 접시 위에 올랐다가 더러운 인간의 뱃속 구경을 하다가 똥통에 빠지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바닥에서 밟히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만약 진정으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선량한 신이었다면 쓰임이 없으니 버려져서 밟힐 것이라는 표현을 쓰기보다는 그들의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드높여주는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너희는 신의 영광을 드높일 자격이 있는 선택된 자들이야. 너희를 선택받게 한 너희의 뛰어난 자질을 최대한 발휘하여 소금처럼 세상을 풍성하게 하는 존재가 되고 그로 인해 너희의 행복과 영광을 찾길 바란다. 너희가 어떤 결정을 하든 어떤 고난을 당하든 나는 너희와 함께 할 거야. 언제나 사랑하고 지지할게."

 

그 외에도 신의 행동에서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신은 자신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따르는 아브라함에게 귀한 외동 아들의 목숨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충성의 증표로 스스로 아브라함 자신과 아들인 13세 소년 이스마엘, 심지어 하인들의 성기까지 훼손하기를 요구했다. 지배욕에 도취한듯한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요구였다. 자신의 피조물을 괴롭히는 것에 죄책감을 느낄 이유도 없다. 그 피조물이 자신과 동등한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피상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 이상화와 평가절하

NPD 환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람들을 이상화하지만, 조금이라도 위협이 된다고 느끼면 그들을 평가절하하거나 배척한다.

모세오경의 신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이상화하며(예: 아브라함과 모세), 반대로 불순종하는 자들을 평가절하하고 벌한다. 자신에게 의심을 품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집트인들에게 고통을 주고 그들을 살해했다. 특히 홍해에서의 대량 학살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죽이지 않아도 될 수많은 이집트 군인들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가 홍해를 갈랐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가고 해안선 초입부를 50미터 정도만 바닷물로 채워놨어도 이집트군이 굳이 홍해로 뛰어들어 그들을 추격하려고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치 사냥꾼이 덫을 놓듯 바다를 완전히 열어놨고 이집트군이 진입하자 바닷물로 그들을 모두 익사시켰다. 이집트인들 역시 아담과 노아의 후손이라서 그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폐를 소금물로 가득 채워버렸다. 그의 이런 잔인한 처분은 엄밀히 따지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이집트인이 그렇게 익사하더라도 이스라엘 민족의 복지와 행복, 안전이 향상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창조한 다양한 해양 생물들에게는 꽤 오랜기간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은총이기는 했다.


4). 통제와 권위

NPD 환자는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강한 욕구를 가지며,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려 한다.

모세오경의 신은 모든 인간 활동을 통제하려 하며, 율법을 통해 인간의 삶 전반에 대한 규칙을 제시한다. 이러한 통제는 신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했듯 복종심을 증명하게 하기 위해서 성기의 훼손까지 요구한다. 남의 바지 안쪽까지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는다. 마취도 없고 철로 만든 예리한 칼도 없었다. 그보다 500년 정도 지난 시점인 출애굽기 4장 25절에도 할례는 돌칼로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년 이스마엘과 아브라함의 종들이 느닷없이 겪었을 강제적이고 치욕스럽고 극심했을 고통을 상상해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러진다.

 

반 농담이긴 하지만, 레위기의 각종 율법들 중에는 홍해에서 이집트군을 대량 학살했던 과거를 후회하는 듯한 면모도 보인다.

물에서 난 것 들 중에서는 비늘 있는 물고기만 먹어야 한다는 율법이 그것이다. 이집트군은 바다에 던져져서 아니라 바다가 그들에게 던져져서 죽었다. 신이 일으킨 기적이 아니면 발생할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죽음이었다. 그들은 무장을 한 상태였고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린 바다로 인해 몸이 물 위에 뜰 겨를은 전혀 없었다. 그들의 사체는 주로 바다의 바닥에서 사는 갑각류, 조개, 해조류들에게 영양을 공급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그런 수산물을 섭취하는 것은 불필요했던 대량학살에 대한 신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 책임은 신이 스스로 지기보다는 감칠맛이 일품인 새우와 랍스터, 굴, 조개를 먹지 못하는 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담하게 되었다.


물론 고대 사회의 가혹한 환경을 감안해야 한다면서 이런 정신 나간 듯 한 행로에 대한 변명을 시도하는 게 가능할 수는 있다. 모세 오경의 신은 인간을 하나의 집단의 일부로 보면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 보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고대에 만들어진 브라만교나 초기 불교의 경우는 인간 한 명 한 명을 소우주로 보고 그들의 자신의 수행에 의하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봤다. 보다 가까이에는 홍익인간 정신도 있다. 비슷한 시기인 약 4천 년 전에 한국에서는 인간이 신을 숭배하는 장기말로서 희생되기보다는 신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시대적 특성만으로 신의 이기적 무자비함에 대한 면책은 어려워 보인다.

 

 

4. 신이 겪은 고초들

 

출애굽기에서 보이는 신의 잔혹성은 이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힘들게 얻어낸 야곱 가문의 완전한 복종이 긴 이집트 생활을 거치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느껴졌고, 그 두려움에 다소 가혹하고 과도한 대응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노아가 언약을 했음에도 그의 후손들은 그것을 지키지 않고 자신을 잊었던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신에 대한 약간의 이해와 연민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가설도 제시해볼 수 있다. 유대인은 신의 선택받은 민족이 아니라 신을 선택한 민족인 것이다.

신은 노아의 계약에 따라 그의 자손들이 모두 자신을 섬길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질 않고 뿔뿔이 흩어졌다. 신은 에덴동산 주변을 서성이면서 사람들에게 계시를 내려본다. 수메르의 통치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뜻은 감사하지만 저희는 이미 안 님과 엔키 님을 섬기고 있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마르둑, 가나안 사람들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과 아세라 부부신 또는 엘과의 의리를 이유로 신을 숭배하길 거절했다. 가장 탐나는 민족이었던 이집트 역시 토속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아마 파라오는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오시리스 님과 라 님이 가짜 우상인건 저만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종교를 바꾸는 것은 파라오의 권위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희 백성들에게는 비밀을 유지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신은 초조했고 이렇게 결심한다.

"저런 상상의 우상 따위를 신으로 착각하다니 어리석고 괘씸한 것들. 우상 숭배는 반드시 금지해야지."

그 중에 어떤 민족의 지도자는 신을 믿겠다고 일단 수락을 했다가 이후에 할례 요구를 받고는 손절했을 수도 있다.

 

취업난에 이력서를 돌리듯이 여러 민족들, 가문들과 접촉하던 신은 마침내 유일하게 아브라함에게 긍정적인 응답을 받는다. 신은 매우 기뻤다. 가짜 우상들 사이에서 유일한 신인 자신을 유일하게 알아 본 아브라함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공을 들이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신을 선택했고 그의 후손들은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거짓 우상이 아닌 진짜 신의 은총을 독점하게 된다. 신은 아브라함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서 100세 남편 아브라함과 90세 아내 사라 불임 노부부에게 아들 이삭까지 낳게 해 준다. 이삭을 재물로 바치려는 일의 뒷 사정은 이럴 수도 있다. 신은 아브라함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서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가 '아차' 싶었을 것이다.

'이미 110살 먹은 아브라함은 얼마 후에 늙어서 죽을텐데 저 아이까지 재물로 바쳐져서 죽으면 누가 날 섬기지? 사라가 이스마엘 쫒아낼 때 말릴 걸 그랬나? 또다시 인간들에게 계시 뿌리는 거 이젠 그만하고 싶다.'

이런 가설은 비록 근거없는 상상에 불과하지만 모든 인간의 창조주인 신이 왜 유독 이스라엘 민족만 골라서 편애했는지, 그리고 우상을 그렇게까지 혐오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5. 신의 성장과 성숙


사람들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는 다소 NPD적인 성향을 보이다가 나이가 들고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면서 그런 결함을 극복해 낸다. 그것이 성장이다. 전지전능함이 반드시 선함과 성숙함을 보장하지는 않고, 전지전능한 철없는 꼬맹이 이미지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분명히 모세 오경 이후에서 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성숙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신은 모세 이후 천여 년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성숙해 갔다. 예를 들어 소돔과 고모라는 가차 없이 파괴했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는 요나를 통해서 갱생할 기회를 줬다. 그런 성장의 최종적인 모습이 예수다.

신은 예수의 몸으로 자신이 만든 세상을 경험한다.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신은 모세 오경 이후에 점차적으로 인간사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줄여나갔고 예수 이전 400년 정도는 인간 세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놀잇감에 싫증이 났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러다가 그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마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이 게임의 호스트이면서 1번 참가자로 게임을 즐기듯, 자신이 그 게임에 1인칭으로 직접 참가해서 즐기는 것이다. 천상에서 완전체로 강림하는 것보다는 인간의 삶을 온전히 즐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적당한 처녀를 찾아서 천사를 시켜 수태 고지를 한 후에 태어난다.

 

그는 여느 유대인 아이처럼 구약 성서를 배우게 된다. 그것은 그가 신이었을 때는 접하지 못했던, 인간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었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은 자기에게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개미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인간은 무력했지만 신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할 능력은 있었다. 신은 구약, 특히 1300년이나 지나버려서 자신의 기억에는 이미 희미해져 있는 토라(모세 오경)의 기록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가 저지른 각종 불필요한 대량 학살들이나 "나를 숭배하여 나를 영광되게 하라. 너는 나의 도구이다" 같은 아동기적 심리를 드러내는 발언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소소하게는 아론의 두 아들의 사소한 의전상 실수를 용서치 않고 불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레위기 10:1,2) 모세와 더불어 자신의 가장 충직한 종이었던 아론은 순식간에 아들을 둘이나 잃었다. 단지 자기가 부렸던 짜증 때문에...  인간의 삶을 경험하면서 그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게 얼마나 어이없는 징벌이었는지를 실감했을 것이다. 요셉의 품에 안겼던 일, 그로부터 차근차근 목수 일을 배워갔던 일들을 겪으면서 아버지로부터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감하고 아들을 잃을 때 아버지의 절망감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아론의 아들들에게 저지른 짓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신경한 일이었는지 뼈저리게 반성했을 것이다. 잊고 싶은 기억이었는데 심지어 사람들은 그걸 연구하고 암송하고 필사까지 하고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관점이 아닌 상대방과 제삼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신의 과거를 보고 부끄러움이 증폭되어서 귀 끝이 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철없던 시절 저지른 잘못된 행동이 유튜브에 박제되어 10억 뷰를 찍은 것을 뒤늦게 발견한 상황과 비슷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인간이 오해했거나 실제 했던 일보다 가혹하게 기록을 남긴 부분을 보고는 억울했을 수도 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예수의 영적인 성장을 이끌었을 것이다.

 

신은 완전하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다는 신학적 고정관념은 구약의 예언서들과 신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도들의 선언 근거한다. 신은 스스로를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의외로 신은 반성하고 변할 줄 아는 존재다. 어떤 선언이 진실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말 자체보다는 행동과 사실을 보는 것이 정확하다. 어떤 바람둥이 남자가 그 해 27번째 꼬시는 여자에게 "내 사랑은 영원합니다"라고 말한다고 그가 영원히 자기만 사랑할 거라고 믿는 여자는 인생 공부가 더 필요하다. 그의 그럴듯한 말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다. 오직 그가 했던 행위들로 그가 하는 주장의 신빙성이 가려질 뿐이다.

 

신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는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변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노아 일행을 제외한 모든 생명을 살해한 걸 후회하며 다시는 홍수로 생명들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언약이 가장 큰 증거다. 인간은 그 이후에도 크나큰 죄악을 반복해서 저지르곤 했지만 신은 과거처럼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지 않았다. 이런 주장을 접하면 신성모독으로 여기면서 신의 뜻은 너무 심오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입장은 신이 정의롭다는 고정 관념, 즉 신정론 고수하다가 생긴 문제일 뿐이다. 기독교의 전통 교리란 다양한 사상들과의 합리적 토론과 논쟁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이 채택된 것이라기보다는 도전자를 권력을 동원해 살해해가면서 고수해 오고 자기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논리를 심화시켜 왔던 것에 불과하다. 긴 설명 대신 에코챔버 이펙트라는 용어로 간략화 할 수도 있다. 편견을 깬 관점에서 구약의 포악한 신이 어떤 짓을 할지를 예상하는 것은 그들의 걱정과 달리 의외로 어렵지 않다. 신적인 막강한 권능을 npd 걸린 애새끼에게 쥐여줬다고 상상해보자. 구약에서 보였던 신의 이해하기 어려웠던 잔악한 모든 행적들은 사실은 투명하게 예상이 가능했던 일이었다.

 

신은 예수의 몸을 통해 인간을 경험하면서 변화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과정에서 어린 시절 양육과 훈육을 담당했던 성모 마리아의 역할이 컸을 것 같다. 예수의 수태는 성령이 마리아의 자궁에 완성된 수정란을 착상시켰는지 정자를 보냈는지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수 있다. 만약 마리아에게 보내진 것이 수정란이었다면 마리아의 역할은 냉정하게 따지자면 예수의 생물학적 어머니라기보다는 대리모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룩한 성모였다. 제멋대로이고 npd였던 신을 인격적으로 성숙시켜주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을 통해 가르쳐 준 위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상상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개미집 입구에 끓는 물을 한가득 붓는 어린이 예수의 등짝을 세게 때리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 줬을 지도 모른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공경은 단지 야만인들이 선호하는 우상 숭배와의 타협의 산물이 아니라 윤리적 가치의 성숙과 성장을 의미한다.

신는 인간 세계를 살아가면서 과거에 자신이 내려줬던 구약 시대의 율법들이 문자적 의미로만 절대화되어 적용됨으로써 사람들을 불합리하게 속박하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율법 주의자들과 투쟁하기도 했고, 율법만을 이유로 끔찍한 죽음을 앞둔 여인을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여인을 돌로 치라"라고 말하여 몸소 구해주기도 했다. 그는 불이 인간에게 얼마나 뜨겁게 느껴지는지, 돌에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가족을 살해당하는 것이 얼마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인지, 사랑하는 사람끼리 얼마나 애틋한 감정을 가지는지를 공감하는 존재가 되었다.

 

예수는 자신이 계획한 역할을 모두 마친 후에 승천했고, 이후 다시는 구약과 같은 형태로 세상에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과거에 했던 자신의 신비적인 개입이 정말 옳았을까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앞으로 자신의 미시적인 개입이 인간의 손에 의해서 어떻게 기록되고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지를 걱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랑을 희생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은 구약에서 말로만 인간을 사랑한다고 떠들거나 아주 가끔 소소한 은총을 베풀었을 뿐 제대로 된 사랑의 증거를 보인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말이 아닌 행동을 보는 것이 정확하다. 자신의 아들이자 자기 자신이기도 한 예수의 고통과 희생으로 신은 더 이상 인간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예수의 희생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에 신은 더 이상 인간들의 인정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갈구할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고 더 이상 이스라엘만 편애할 이유가 없어졌다. 다양한 민족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그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스스로 33년간 인간의 생활을 체험했고 끝내 인간을 대속하여 그들의 적나라한 죄악을 생생하게 경험해 봤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유들로 신은 인간의 숭배에 대한 집착 없이 온전히 그들의 자유 의지를 관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신은 인간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 하면서도 인간을 만들기 전에 느꼈던 태초의 심심함에서는 벗어나는 최종적인 안식을 누리게 된 것 같다.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것은 내 지식과 깨달음에 발전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번복할 준비가 되어있는 잡문이다.

 

 

 

 

부록

 

부록 1. 창조의 동기로서 '신의 심심함' 논증

 

신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는다. 아마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오랜 시간 이전부터 신은 존재했을 것이고 그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관점에서 그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시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런 영원한 시간 동안 신이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천 년 전 쯤에 신은 드디어 심심함을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래서 인간을 만든 것 같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이유가 성경에 쓰여있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신학자들은 선, 사랑, 계획 등의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이유들을 별다른 논리적 근거 없이 내세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에는 이런 약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다른 어떤 것도 없이 신 혼자만 영원히 존재하는데 계획이라는 것이 왜 필요할까? 혼자만 있는데 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데 사랑을 위해서 창조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자기애라는 뜻일까? 아니면 뭔가를 만들어 놓은 다음에 그것을 사랑을 하겠다는 것인가? 이런 물음들을 한 단계 거치고 나면 그런 이유들의 최종적인 동기는 결국은 심심함으로 귀결되지 않을까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기로 한다. 이해하기 쉽게 예시를 들어보겠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보면 무인도에 혼자 표류한 사람이 배구공에 사람 얼굴 모양을 그려서 그것에 말을 걸고 친구처럼 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심심하고 외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그 배구공 인형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그 인형은 사랑하기 위해 만든게 아니라 심심하고 외로웠기 때문에 만든 것이고 사랑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즉 사랑과 계획, 선은 창조의 결과일뿐 창조의 동기라고 보면 선후 관계 역전 문제가 생긴다.

 

신의 입장에 이입하는 형식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다.

사랑: 만들어보고 나니까 보기에 좋았다.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듬뿍 사랑해줘야지.

계획: 아담과 하와만 데리고 영원히 오순도순 살고 싶었는데 이 멍청이들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러질 못하고 죽게 되었구나. 그래서 이놈들은 자손을 만들게 되지. 이놈들이 무한히 번식한 영혼이 자꾸 쌓이는데 어떡하지? 맞다! 구원을 해야지. 이제부터 구원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겠어.

선: 그런데 이놈들이 시키는대로 안하네. 선악과를 따먹네. 동생을 죽이네. 바벨탑을 만드네. 이놈들에게 선을 구현하게 해야겠다. 그대로 방치하니까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질어질하다.

 

신의 창조 행위를 뜻하는  "존재의 충만함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발현" 같은 신학적이고 근사한 표현을 일상적 표현으로 변환하면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욕구가 충족되어 딱히 바라는 건 없지만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하고 싶어서 뭔가를 함"이라는 뜻이다. 그것에 해당하는 이런 예시를 들 수 있다. 할 일은 없고 딱히 걱정거리도 없이 평화롭게 앉아있다가 불현듯 목각 인형을 깎기 시작한다. 그런 일은 왜 하느냐는 물음에 대답한다. "심심해서." 또는 "그냥." 또는 "별 생각 없어."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일종의 결핍 상태인 심심함이 성립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에 대해서는 심심함이 결핍이다 또는 결핍이 아니다 라는 각각의 방향으로 해명이 가능하다.

 

신이 심심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현재 상태가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정적인 상태로 인해 자극의 부족을 경험했음을 나타낸다. 심심함은 "결핍"이라는 부정적 개념이 아니라, 더 나은 상태를 향한 본질적인 욕구로 해석될 수 있다.
창조 행위는 이러한 심심함을 해소하고 재미를 얻기 위한 행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완전함은 정적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동적 완전함으로, 창조를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충동을 내포할 수 있다. 따라서 "심심함"은 신의 결함이 아니라, 신의 완전성의 일부로서의 창조적 에너지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런 답변도 가능하다. 신은 완벽하기 때문에 현재는 아무런 결핍이 없는 상태이다. 결핍 없는 현재 상태는 과거에 했던 창조의 결과이다. 하지만 신이 창조를 하지 않았으면 심심함을 경험했을 것인데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기 위해서 창조를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은 심심함을 실제로 경험한 적은 없고 한번도 완전함의 손상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창조의 원인이 심심함의 해소라는 주장의 요지는 유지된다. 굶주림을 대비하기 위해서 식량을 준비하는 자가 굶주림의 고통을 경험하지 않은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또 다른 반론 방법은 좀 더 근원적인 면을 공격하는 것인데 심심함이 결핍이라는 주장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신의 완전함이란 신의 속성이다. 그런데 재미는 속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재미는 외부의 자극과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생각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창조 전 시점에서는 신 홀로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적 자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자극과 그에 대한 경험도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이란 것은 오로지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 무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신은 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재미라는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특정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노여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서 항상 노여운 상태는 아니고 마찬가지로 재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항상 재미있는 상태인 것은 아니다. 또한 노여움이나 질투 역시 불만족이자 결핍을 의미하는데 그런 모습 때문에 신의 완전함을 의심하는 시선은 없었던 것 같다. 신이 그런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면 성경, 특히 모세 오경 부분을 펴보면 된다.

 

그리고 완전하기 때문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신이라면 기존의 주장인 사랑, 선, 계획도 창조를 통하지 않고도 내재적으로 해결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창조를 했다. 스스로의 완전함으로 해결될 수 없는 갈증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갈증 때문에 신은 6일간 중노동을 했고 마지막 날에는 앓아 눕기까지 했다. 신은 그만큼 절실했거나 재미를 느꼈다. 창세기에 언급되는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은 창조를 통해 그러한 재미라는 감정의 발생을 보여준다.

 

창세기와 구약 성경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신은 변변찮은 인간들이 보이는 성격상 결함들을 종종 노출했다. 때문에 인간이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섭리라든지 고결한 목적과 신의 계획 때문에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것이라는 가설은 그리 개연성이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고 경솔하고 옹졸한 창세기의 신 수준에서는 심심함 정도면 창조의 동기로 추정하기에 어색하지 않다고 할 만 하다. 나는 자체적인 헛점을 내포한 사랑, 선, 계획이 아니라 그것보다 한단계 더 근원적이고 아직 별다른 모순을 발견하지 못한 심심함이라는 동기를 가장 유력한 가설로 본다. 여러 가지 이론들 중에서 불필요한 가정을 요구하지 않는 가장 단순한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오컴의 면도날 원리에 의하면 복잡한 해명이 필요한 다른 가설들에 비해서 심심함 가설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감히 신에게 심심함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투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신은 스스로 질투심이 많다고 인간에게 고백한 바 있다. 또한 성경에는 만족, 기쁨, 사랑, 자비와 긍휼, 한탄과 근심, 후회, 진노 같은 신의 감정 표현도 등장한다.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신은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만을 보여왔다. 신의 인간적인 감정 표현들이 이렇게 성경에 풍부하게 나오는데도, 심심함이라는 감정만큼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신에게 투사해서는 안된다고 단정하는 것이 오히려 성경의 내용에 반하는 주장 아닐까?

 

 

 

 

부록 2. 전지함 논증

 

신은 모든 것을 아는 전지한 존재라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전지함은 자유 의지라는 교리와 충돌한다. 두가지 양립할 수 없는 명제를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가지가 양립이 가능함을 입증하든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일단 자유 의지는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명하게 체감하는 공리에 가깝다. 의심이 들지도 않고 억지로라도 부정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문제는 누구나 동의하기는 어려운 전지함이다.

 

성경에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말만으로는 무엇이든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도 말로는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고 그 말을 일기장에 적거나 친구들에게 떠벌이고 다닐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다고 전지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안다라는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그렇게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신의 전지성은 선언적으로만 존재할 뿐, 그것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초월한다고 볼만한 근거는 성경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이 많다. 선악과를 먹은 것을 하와가 아닌 아담에게 먼저 책임을 물은 것, 홍수를 일으키고 나서 자기가 후회할 것(심지어 이건 자기가 어떤 기분을 느낄지 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사례임), 모세가 석판을 받기 위해 산에 들어가서 자리를 비우면 유대인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에 대한 무대비  등. 신앙적인 교리의 영역인데 너무 논리적으로만 몰아대는 게 부적절해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자유 의지는 신의 전지성과 동등한 지위이면서 양립이 불가능한 교리이다. 따라서 둘 사이의 서열 정리는 필수적이다.

칼뱅은 위대한 신의 전지함을 유지하기 위해 하찮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실상 박탈하는 해석을 했다. 양립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별로 따질 것이 없다.

신은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할지 알지만 자유 의지를 존중하므로 관여하지 않는다라는 아르미니우스주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신이 선한 존재라는 주장과 양립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인간이 신을 등지고 파멸의 길로 갈 때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설득도 전혀 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그 길에 덫을 놓고 살육을 즐기는 신을 선한 존재라고 보는 것은 모순적이다.

신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보는 보에티우스식 영원론으로 전지함과 자유의지의 양립을 설명하려 시도하긴 하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종종 발견되는 신의 후회와 상충된다.

 

신은 성경에 근거한 존재다. 하지만 신학자들은 신의 전지전능을 주장하기 위해서 성경에 나온 바로 그 신이 아닌 자기가 새로 상상해 낸 신을 내세우는 경향들이 있다. 성경에서 신은 시간을 초월하여 인간이 자유 의지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예측한 모습을 전혀 보여준 적이 없음에도 그들이 만들어 낸 신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서 신은 후회도 하고 인간들의 돌발 행동으로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하기도 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대량학살도 저지른다. 신학자들이 자신이 바라는 신의 속성이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신 자체를 교체해버린 셈다. 신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있는 그대로의 신을 받아들이질 못하고 자기가 원하는 형태로 신을 변형 내지 창조해버리는 것이 오히려 신성 모독적이지 않을까? 만약 어떤 힘센 남자의 아이가 "우리 아빠는 맨손으로 한번에 사자 세 마리를 때려잡을 수 있어. 사자 한마리도 맨손으로 못 때려잡는 건 남자도 아냐."라고 떠들고 다니면 그 아버지는 아이를 말리고 싶지 않을까? 심지어 그 남자가 창을 이용해서 사자에게 부상을 입히고 자신도 크게 다치면서 간신히 쫒아낸 영웅적인 상황을 보면서 "우리 아빠는 저 따위 약자가 아니야"라고 아버지를 부정하거나 "아빠가 아침을 안드셔서 그랬나봐."라고 사실을 왜곡한다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 된다.

 

전지성은 자유 의지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과 결과를 아는 것이라는 신학적 해석(몰리니즘)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납득할만한 주장이 되지는 못한다. 나 역시 미국인들의 자유 의지의 결정되는 다음 미국 대통령 선거의 모든 가능성과 결과를 알고 있다. 그것은 공화당 승리하는 결과와 민주당이 승리하는 결과이다. 즉 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모든 결과를 알고 있다. 그런데 진짜 전지함이란 이런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어느 당이 대선에서 승리할지를 아는 것이다.

 

어떤 남자가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을 하려고 고민을 한다. 신에게 물어본다. "제가 그 여자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신이 기존 신학의 전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여자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마음을 여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마음을 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생각한 전지한 신이라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여자에게 고백은 해봤니? 안해봤다고? 그렇다면 나로서도 알 수 없구나. 그 여자의 자유 의지니까."

그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 고백을 한 후에 여자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라는 대답을 했다. 그는 밤늦은 시간에 뒤숭숭해서 몸을 뒤척이다가 신에게 다시 물어본다. 전지한 신은 이런식으로 대답할 수 있다.

"그 여자가 생각해보겠다고 네게 말한 걸 나도 봤단다. 그 여자 2시간 정도 고민해보고는 생각을 마쳤더구나. 그 여자 지금 너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는데, 좋아서 죽으려고 하고 있어. 축하한다. 내일부터 1일이야. 없어보이니까 당장 전화하고 싶은 마음은 꾹 참고 내일 만날 때까지 기다리거라." 

 

나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위해서 신이 자신의 전지함 중 일부를 잠시 내려 놨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또다른 예시로 욥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신은 풍요롭고 행복한 욥에게 시련을 줘도 그가 계속 신앙을 유지할지를 알기 위해서 잔인한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욥이 신앙을 유지할지는 자유 의지의 영역이기 때문에 신의 전지함이 미치지 못했고 그런 시험이 필요했다. 인간의 현재 가지고 있는 마음은 들여다보지만 미래에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에 대해서는 잠시 눈길을 피해 주는 것. 신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지켜주기 위해 자기 능력의 일부를 자제하는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면 자유 의지와의 충돌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이는 개방신론과 유사하지만 신이 알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자제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 관점에서는 신이 자신의 능력을 자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전지하지 않은 게 아니라 인간을 배려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제심은 신의 위대함을 손상시킨다기보다는 신을 더욱 사랑에 충만한 거룩한 존재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