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현대적 불교에 적합한 수행자의 자세

누미 2024. 9. 19. 12:46

불교의 수행자의 목표는 해탈이다.
해탈은 사성제 중 멸성제인데 그 내용은 삼법인이다.
삼법인은 세가지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제법무아, 제행무상, 열반적정이다.
제법무아는 고정된 나라는 실체는 없다는 뜻이고 제행무상은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이 계속해서 변한다는 뜻이다. 열반적정이란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평온하게 된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무아와 무상을 깨닫고 열반에 들어가면 되는 상당히 간명한 목표다. 그리고 석가모니가 알려준 내용을 단순히 이성과 논리적 이해를 넘어 체화하는 단계에 이르면 해탈을 했다고 할 것이다. 삼법인은 그것을 발견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지만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없다. 달걀을 세우는 법을 생각해내기는 어렵지만 콜롬버스의 방법을 접한 후 그것을 이해하고 모방하기는 어렵지 않은 것과 같다. 석가모니가 위대한 이유는 그가 최초로 해탈을 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해탈의 내용인 삼법인과 그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원리인 사성제를 사람들에게 알려줬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불교의 경전들은 점차 비대해져서 원래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를 헷갈리게 한다. 삼법인을 체화하려면 중도와 팔정도에 따른 수행을 하면 된다. 그런데 '당신은 깨달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런 복잡하고 지엽적인 이론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모습을 보면 불교의 본질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혹은 이미 깨닫고도 깨달음에 대한 과도한 기대 때문에 자신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한다.

불교의 경전이 방대해지고 교리가 심오하고 난해해진 데는 대승불교의 역할이 크다. 석가모니는 생전에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형이상학이나 복잡한 교리 해설보다는 수행과 해탈 자체에 매진할 것을 권했다. 그럼에도 왜 대승불교의 교리는 그렇게 복잡해진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대승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보살행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자신이 깨달았다는 확신이 없다면 팔정도와 육바라밀 수행을 하면서 삼법인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는 방대한 불교 교리는 크게 필요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결정적인 조력 없이 6년을 수행해서 스스로 그 길을 찾아냈다. 석가모니처럼 스스로 길을 발견할 필요없이 이미 제시된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수행했다면 삼법인을 체화하여 깨닫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근본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 보살행을 실천하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살행이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내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은 고통의 바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수영을 익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중생을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면 나는 수영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학생이 배우는 교과서와 선생이 학생을 가르칠때 사용하는 교육 지침서에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이 당연하다.

법화경에서는 이를 불난 집의 비유로 설명한다. 집에 불이 났는데 아이들이 빠져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집안에서 놀겠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집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 불이 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밖에 나오면 더 재미있는 놀잇감들이 있다고 유혹하여 아이들을 집 밖으로 이끌어낸다. 이는 방편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이야기인데 방편은 반드시 쉬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사성제의 원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 욕구도 있고 교리의 헛점을 비판하면서 불교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교리를 체계화하고 정밀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유식, 공, 중관 같은 사상이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전근대의  교육수준이 높지 않았던 대중들을 위한 극락정토와 염불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불교가 나아갈 길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이제는 대부분 사람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불교 이론을 쉽게 설명해주는 각종 서적과 영상들이 범람하고 있다. 방편이 더 이상 필수적이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삼법인을 체화한 승려라면 자신이 깨달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좋다. 불교는 무아 때문에 내세보다 현세가 중요하다. 따라서 해탈 역시 내세에서나 기약할만한 것으로 막연히 생각하기보다는 현세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게 좋다. 주변에 해탈에 대한 롤모델이 있으면 수행에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한 평생 수행만 한 나이 든 승려가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라고 말하면서 깨달음을 석가모니, 아미타 같은 부처나 관세음, 문수, 보현 등 몇몇 유명한 보살의 경지를 요구하는 개념처럼 설명한다면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은 현세의 해탈과 수행에 대한 의욕이 꺾일 수밖에 없다. '속세와 인연을 끊고 평생을 바쳐도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재가신도인 내가 어떻게 달성하겠는가'라고 느끼면서 수행을 포기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승려가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기준을 지나치게 높게 설정하면서 벌이는 '도를 넘는 겸양'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이 현세에 깨달음을 얻은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전수하면서 재가신도의 해탈을 돕는 것이 진정한 보살행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