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고집멸도와 고집도멸 그리고 허무주의

누미 2024. 9. 4. 12:17

인터넷 게임 광고를 보다가 느낀 점이다.
게임 광고 중에는 단순히 게임 내용에 대한 영상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짧은 시간 동안 그 게임을 체험하게 하는 유형도 있다. 광고 시간 동안 게임을 하느냐 마느냐는 내 마음이다. 어차피 일정 시간 동안은 그 광고에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냥 한번 플레이해봤다. 나름 재미를 느껴서 열심히 하다 보니 광고를 스킵할 수 있는 시간을 훌쩍 넘겨서 플레이를 했고 마지막 관문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관문을 통과하면 더 이상 컨텐츠가 없다. 나는 게임의 탈을 쓴 실체 없는 광고물을 붙들고 있었을 뿐이다. 이 광고물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해 봤자 하이스코어에 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음에 게임을 이어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점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몇 초를 더 써서 저 관문을 통과하는 게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집착을 놓고 스킵 버튼을 눌렀다. 더 이상 게임을 진행하는 것에 별 의미가 없다는 점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몇 초를 소비하는 게 공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느껴졌다. 1분 남짓한 시간과 단편적인 컨텐츠로 이루어진 하찮은 게임 세계에 한정하여 일어난 “작고 하찮은 멸성제”였던 셈이다. 그러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느낀 것은 무아와 무상 거기에 부대한 공, 그리고 허무이다. 허무는 깨달음의 내용에 포함된 것이 아닌데 불필요한 부산물이 섞여 들어온 것이다. 깨달음 이후의 삶에 허무가 섞인다면 그것을 진정한 해탈이라 할 수 있을까? 멸성제란 결국은 삼법인을 체화하는 것인데 삼법인의 내용 중에는 허무를 극복하거나 예방할만한 내용은 없다. 그래서 나는 사성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이다.
하지만 사성제를 처음 접했을 때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었다. 바로 사성제의 내용인 고집멸도의 순서 때문이었다.
나는 이것을 시간의 선후나 논리적 인과의 순서로 생각했다.

고: 인생은 괴롭구나를 자각함
집: 괴로움의 원인과 실체를 알게 됨
멸: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룸
도: 팔정도와 중도를 통한 수행.

시간순이나 인과순이라면 고집멸도가 아니라 고집도멸이 맞다. 해탈은 수행 후에 맞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집멸도를 시간과 인과의 순서로 보면서 멸성제를 해탈과 열반이 아닌 열반의 가능성 발견이라는 해설이 있긴 한데 납득이 되기보다는 '그렇다면 도대체 해탈과 열반은 언제 한단 말인가? 수행만 하다가 죽으란 건가?'라는 의문을 느낄 뿐이었다. 그런 의견을 뒤로하고 고집멸도로 순서를 정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멸성제를 이론으로만 깨닫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을 수 있다. 멸성제의 내용은 삼법인이다.
무아:
석가모니의 시대에 비해 과학 지식이 크게 향상된 현재 시점에서 무아에 대한 이해는 훨씬 직관적이 되어서 이런식의 설명도 가능하다. 나는 원자들의 조합이고 내 몸의 세포는 작년과 올해는 완전히 다른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정자와 난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졌다가 100년 후에는 어떤 땅속 벌레의 똥이 되었다가 이산화탄소가 되어버릴 것이다. 정신적인 측면에서 자아는 뇌세포의 전기적 신호의 상호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무상:
저 산도 언젠가는 없어지고 저 곳에 산이 아닌 강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열반:
깨닫고 열반하면 당연히 평온하겠지.

물론 멸성제가 이렇게 간단하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삼법인을 단지 언어적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깊은 이해와 체화를 통해 삶 속에서 구현하는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삼법인을 체화하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자비심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팔정도가 없다면 사람의 성격에 따라서는 허무라는 부산물을 만들 수 있다. 그런 경우 도성제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야만 비로소 부작용 없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팔정도의 수행을 통해 매 순간에 집중하고, 바른 행동과 노력을 실천함으로써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이는 허무감이 스며들 여지를 없애줄 수 있다.

우선 정견과 정사유로 바른 이해와 사고를 한다. 무상에 대해 허무하고 덧없다는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염세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갖도록 돕는다. 그리고 정어, 정업, 정명으로 윤리적 삶을 실천한다.  책임감을 갖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단절과 고립 대신 연결과 연대를 통해 허무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정정진, 정념, 정정에 따른 수행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현재에 집중함으로써 허무에 빠지지 않은 평온한 마음 상태를 유지한다.
간단히 말해, 팔정도는 무아와 무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삶의 의미와 목표를 스스로 부여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실천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멸성제를 이루더라도 이후 끊임없는 도성제가 필요한 이유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멸성제와 도성제를 분리 가능한 개념으로 보는 것이라 팔정도를 멸성제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로 보아 둘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는 전통적 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멸성제와 팔정도는 불가분이기 때문에 무상과 무아를 깨닫더라도 거기에 허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전통적인 불교의 교리에는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론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팔정도가 반드시 유일한 길인지에 대해서는 의심해볼 수도 있다. 그것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후에 스스로 고안한 수행법이다. 자신은 팔정도를 다른 이에게 배우지 않았다. 따라서 팔정도는 멸성제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기보다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판단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한 길이 무엇일까를 연구한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본다. 팔정도가 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 아닐 수 있다는 가정의 실증적인 증거로는 선종에서 좌선과 화두 참구로 깨닫는 돈오점수나 정토종의 아미타불에 의한 타력신앙도 열반에 이르는 다른 방법으로 제시될 수 있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영원한 윤회가 절대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세계관에서는 허무가 애초에 발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허무감은 고성제의 8고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석가모니는 무아와 무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나서 허무감이라는 낮선 감정을 느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팔정도를 고안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겪은 혼란을 피하게 해 주기 위해 처음부터 팔정도로 수행을 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이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상상에 불과하지만, 논리적 개연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가설적인 관점이라면 고집도멸이 아닌 고집멸도가 석가모니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시간적, 인과적 순서를 정확히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물론 이런 관점은 논리적 추정일 뿐이고 전통적인 입장과 차이가 크기 때문에 틀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인정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입장을 취하더라도 팔정도가 수행의 왕도라는 결론으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이런 상상은 지적인 자극 이외에 실질적인 이익은 없다고 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