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각형론 - 자유와 권리에 대하여(쓰는 중)
글을 너무 오래 방치중인데 잊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풀어가 볼 생각이다.
서문
이 글은 나의 행동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했을 때 나는 반드시 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타인이 어떤 영역을 선점했다면 그 영역으로 진출할 나의 자유는 원천적으로 차단되는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에 작성 기간이 길어지고 생각을 할수록 미리 정리해 놓은 생각이 나중에 봤을 때 많이 미흡하다는 점을 깨닫곤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답변은 공리주의나 정언명령보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찾을 수 있다.
공리주의는 다수의 힘으로 소수의 배타적 권리 자체를 박탈하는 부작용이 있다.
정언명령 역시 답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 각각의 가치관과 신념은 꽤나 주관적이기 때문에 정언명령은 오히려 타인과의 갈등을 과도하게 확대시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타인과 갈등할 때 자신만의 정언명령에 의해 자기 입장에 도덕적 정당성까지 부여할 수도 있게 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그런 정언명령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인지를 검토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원위치로 되돌아오는 문제가 있다. 즉 정의=정언명령=보편적 입법원리로 동어 반복만 하는 셈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일단 하나의 정언명령을 정하고 나면 그것을 기계적으로 고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컨데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있으면 선의의 거짓말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 정언명령이기 때문에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나마 가장 부작용이 적은 대안을 고른다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따라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꼽을 수 있다. 다만 나의 판단에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여긴 행위가 타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권리가 침해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데 밀은 자유론에서 이런 충돌에 대한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자유론은 2권이 있어야 온전히 완결될 수 있다. 아래는 자유론 2권 요약본의 예시이다.
(1,2파트는 생소한 개념을 도입하므로 다소 자세히 써야 함)
1.중요한 개념들
1-1) 권리의 두가지 축 - 영향력과 권리의식
권리란 타인의 존재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권리를 주장할 상대방이 없다면 권리는 무의미하다. 무인도에 홀로 표류하게 된 사람을 상상해보자. 그 섬에 아무리 많은 과일과 사냥감들이 넘쳐나더라도 그 사람만의 소유권이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그 배타적 소유권에 대해 주장할 상대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리는 영향력과 권리의식이 겹치는 곳에서 만들어진다.
어떠한 이익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영향력의 범주에 있어야 한다. 무인도에 표류중인 어떤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가 거주 중인 섬은 먹고 살기엔 풍족할 정도의 사냥감과 물고기들과 각종 열매들이 널려 있지만 그가 좋아하는 달콤한 과즙이 터져 나오는 망고만은 없다. 3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A라는 무인도가 있고 거기에 망고 나무 숲이 보인다. 그가 수영이나 항해로 30미터를 건너갈 능력이 없다면 그는 망고 숲을 눈 앞에 두고도 망고를 한 개도 얻을 수 없다. 또한 만약 이후 다른 사람이 A섬으로 표류할 경우 그는 새로 도착한 사람에게 망고 나무에 대한 선점권이나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이 자신의 영향력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에 도착한 이웃 섬 사람이 망고 열매를 가지고 해협을 건너오면 망고의 대가로 자기가 가진 것들을 내어 줘야 한다.
권리를 이루는 또 다른 축은 권리의식이다. 권리의식은 자신에게 정당한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다. '법은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라는 법언은 영향력은 있지만 권리의식이 없을 때의 위험을 경고한 것이라 본다. 위의 사람은 권리의식은 충만하여 옆 섬의 아몬드를 갈망했지만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여 아몬드에 대한 권리를 얻지 못했다. 권리의식이 부족한 경우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그는 집을 짓는 목재로 쓰기 적합한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그런데 나무의 엄청난 크기에 압도되어서 그 나무를 자르면 부정탈 것 같다는 토테미즘에 사로잡힌다. 그렇게 나무를 숭배하며 벌채를 포기한다면 그는 나무를 목재로 가공할 권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
가상의 섬에서 벗어나 좀 더 현실적인 예를 든다면, 토지의 경계가 잘못 표시된 상태에서 땅을 사서 인접한 남의 토지를 점유하고 취득시효를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경우 남의 땅을 점유한 사람은 권리의식은(자기가 그 땅을 샀다고 생각) 있지만 권리는 없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남이 자기 소유인 땅을 점유한 것을 모르고 방치한 사람은 침탈된 토지에 대한 권리의식이 없었다고(자기 땅인줄 모름) 할 것이다. 또한 점유 취득시효를 완성하고도 상대에게 땅을 무상으로 돌려주거나 또는 분필 등기를 청구하면서 땅값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영향력은 있지만 권리의식이 차마 그에 미치지 못해서(자기가 타인의 땅을 공짜로 빼앗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 결과적으로 권리를 얻지 못한 셈이다.
1-2) 육각형
원은 내부 압력에 의해 형성된 안정적 형태이다. 반면에 육각형은 여러 방향의 힘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화된 구조이다.
비닐 봉투에 물을 부으면 원기둥 형태가 된다. 내용물을 최소한의 면적에 가두어 두려는 테두리의 힘과 내용물의 팽창력이 균형을 이루기 때문이다. 원은 내부로부터의 압력이 있을 때 도달하게 되는 가장 안정적인 형상이다.
한편, 여러 압력이 공존하는 제한된 공간에서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가장 안정적인 형상은 육각형이다. 벌집이 육각인 이유는 벌이 육각형을 좋아해서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니다. 연약한 밀납으로 꿀을 담는 방을 만들어 놓으면 처음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다. 그러다가 방 하나에 꿀을 채워 놓으면 원기둥 모양이 된다. 꿀을 채워 넣는 방이 점점 많아지고 팽창하려는 꿀의 압력이 모든 방 사이에 균형을 이루게 되면 벌집은 원형이 아닌 육각형의 묶음 형태가 된다.
비눗방울도 비슷한 원리를 보여준다. 방울이 하나만 있을 때는 원형을 유지하지만 여러 거품들로 모여 있을 때 위에서 내려다보면 각각의 방울의 수평 단면은 육각형 형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가상의 실험을 상상해 보자. 물을 채운 우산 비닐들을 우산 꽂이에 빽빽하게 꽂으면, 원래 원기둥이었던 비닐들이 육각형 기둥으로 변형될 것이다. 이로 인해 우산 꽂이 내부는 벌집 구조를 이루게 될 것이다.
내부가 벌집구조인 가상의 우산꽂이는 내부에서 발생하는 힘의 상호 작용에 대한 예시로 이후 계속 사용하겠다.
이러한 원리는 사회 구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개인의 권리 범위는 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살면서 권리는 충돌과 조정을 거쳐 원은 육각형으로 안정화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상세히 설명하겠다.
2. 자유권의 영역
한 사람의 권리는 그의 영향력과 권리의식으로 결정된다. 한 사람이 팔을 벌려 한바퀴 돌면 손끝의 궤적이 그의 영역이라 가정하자. 주변에 기둥이나 벽 같은 장해물이 없다면 영향력의 범주는 원으로 형성된다. 영향력은 팔의 길이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경우 각각 팔을 벌리고 한바퀴씩 돌면 그림1의 B와 C영역에서는 손끝이 부딪치게 된다. 사람 사이의 거리를 많이 띄우면 부딪침을 피할 수 있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사회에서 서로간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과 영향력의 범주가 겹치는 경우 각각의 영역은 원형이 아니라 벌집이나 비누거품 처럼 육각형으로 형성된다.(그림2: 정육각형 모양이 되도록 더 잘 그리고 싶었지만 내 능력에선 이정도로 그리는게 한계다.) 벌집의 모양은 각 방마다의 팽창하려는 힘들의 균형에 의하여 형성되고 사람들의 자유권은 상호간 충돌 및 견제에 의하여 균형이 이루어진다. 양자는 상반되는 힘의 균형의 결과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원 안쪽에 있는 육각형 바깥 영역은(그림1의 C에 해당하는 부분) 다른 손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혹은 다른 손과의 다툼에서 밀려나 팔을 뻗지 못하게 된 부분이다
. 팔을 얼마나 펼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절대적으로 권리의식의 영향 하에 있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기 때문에 권리의식은 반드시 영향력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얼마든지 그 이상으로 뻗어나올 수 있다. 예컨데 팔의 길이가 모자란다면 막대기를 들어서 영역을 넓히거나 소리를 질러서 주변으로 접근하려는 타인을 견제할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서 남들과 부딪치기도 전에 기꺼이 자신의 영향력 포기하는 경우 그 사람의 권리의 크기는 타인의 원과 접하는 육각형 안쪽의 작은 원으로 나타낼 수 있다.
또 다른 경우는 지레 겁 먹고 자신의 권리를 미리 포기하지는 않지만 타인과의 충돌이 발생한 경우 곧바로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경우는 육각형 안쪽을 타인의 원호로 파먹힌 형태로 아래 그림에서 붉은색 선으로 둘러싸인 부분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런식으로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개인의 권리는 일정 부분 축소가 된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제약되는지를 수치화 해보겠다.
그림 2처럼 모든 사람의 힘이 완전한 균형을 이룬다면 권리의 크기는 정육각형 벌집 구조를 이루게 된다.
타인과의 충돌이 없었을 때 한 사람의 영향력을 원의 반지름으로 보고 그 길이를 2로 본다면 그 사람의 권리의 크기는 2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의 면적인 4π ≒ 12.56이다.
이 원에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면적은 6 * √3 ≒ 10.39이다.
(참고: 그 정육각형은 한 변의 길이가 2인 정삼각형 6개로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과의 충돌과 힘의 균형으로 나의 권리는 17.3%정도 제한된다. (1 - 10.39/12.56 ≒ 17.3%)
그림 3과 4 경우처럼 타인과의 충돌에 내가 맞서지 않는다면 타인은 원으로 표현되는 자신들의 온전한 권리인 12.56을 누릴 수 있다.
그림 3의 경우인 극히 소심한 첫번째 사람은 2 - 2*(2-√3)을 반지름으로 하는 원의 면적인 6.73 만큼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이 포기함으로 인하여 타인이 누리는 권리의 절반 수준이고, 정상적인 견제와 균형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권리 즉 육각형인 그림2에 비해 65%정도에 불과한 크기이다.(≒6.73/10.39)
그림 4의 경우, 즉 마찰이 생길 때마다 항상 양보하는 사람은 10.39 - (12.56 - 10.39) ≒ 8.22만큼 권리를 가진다. (원형에서 육각형으로 양보하면서 포기한 면적을 육각형에서 추가로 뺀 면적임)
위의 그림들로 권리의 영역을 4가지 유형으로 구별하고 그 크기를 백분율 순서로 나열하겠다.
바깥원: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이론상 최대 영역 100%
육각형: 다른 사람들과의 투쟁과 견제로 만들어지는 균형점 82.7%
육각별: 충돌할 때마다 양보하는 경우 남겨지는영역: 65.8%
안쪽원: 충돌을 애초에 겪지 않으려 스스로 조심하는 경우: 53.6%
3 권리의 포기와 극복
3-1. 쩍벌남을 대하는 방식 (스스로 포기한 권리)
가끔 지하철에서 다리를 최대한 벌려서 앉는 사람을 접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대체로 그런 사람을 꺼리는 이유는 그의 다리가 자신의 공간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다리 힘이 강하다면 그 사람의 다리를 힘으로 밀어낼 수 있다. 하지만 힘으로 제압하더라도 그들과의 만남이 편한 것은 아니다. 승리는 쩍벌남과와 닿는 허벅지의 뜨거움과 압박감, 지속적으로 힘을 줘야 하는 번거로움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 조용한 싸움의 전리품은 몰상식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이상한 정의감과 그에 따른 한심스런 승리감 뿐이다. 편함을 추구하는 입장이라면 손해이다. 그래서 다리 힘이 충분히 강한 사람이라도 쩍벌남이 옆에 앉은 경우 대개는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 다리를 조금 오므려서 내 영역에 그의 침입을 허용하게 된다.
만약 다리 힘이 좋은 어떤 사람이 특정한 한명의 쩍벌남과 반복해서 옆에 앉아서 다소 의무감을 갖고 불편을 감수하며 매번 다리 힘으로 그를 찍어 눌러 다리의 열기와 압박감을 반사해 준다면 그의 쩍벌 버릇을 교정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같은 사람을 반복적으로 만나서 옆자리에 앉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상 학습시킬 수 없는 불특정 다수와 불편한 투쟁을 특정 개인이 이어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다리 힘이 강하더라도 쩍벌남이 옆에 앉으면 그 비매너에 맞서기보다는 다리를 오므려서 당장의 불편을 최소화한다. 이는 개인적 관점에서는 합리적 선택이다.
갈등이 발생할 때면 저항하기 보다는 투쟁으로 생길 불편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는 경우가 흔히 보인다. 이런 선택은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생각과 맞닿아있다. 그가 똥을 피한 덕분에 쩍벌남들은 허벅지의 압박과 열기라는 불편을 겪지 않고 쩍벌 자세를 쟁취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내가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쩍벌남은 내가 당연히 점유해야 할 공간에 무혈입성한 셈이다.
이렇게 이기심과 몰상식으로 무장한 자들은 자신들이 의도적으로 조직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형성된 가상의 연대 덕분에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3-2). 권리 포기의 위험성
육각형은 상호 견제와 투쟁을 거친 균형의 결과물이다. 나름의 합리성에 의하여 사람들이 쩍벌남들에게 항복한 것과 마찬가지로 갈등과 충돌에서 오는 고단함을 피하기 위해 그림 3처럼 스스로의 자유를 작게 설정하거나 충돌이 있을때마다 양보하는 그림 4 같은 선택이 있을 수 있다.
현실 생활에서 그림 3과 같은 경우가 발생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매체에서는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잠재적인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 통신과 매체의 발달로 개인의 사적인 표현이 대중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기존 언론과 방송사에서 지키던 규범이 개인적 차원까지 강요되기도 한다. '씹선비화'라는 속된 신조어가 이런 현상을 적절히 표현한다고 본다. 그리하여 일개 개인조차도 스스로를 검열하고 자기 생각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기 어려워하게 된다.
그림4의 경우는 영역에서 다른 사람과의 충돌이 발생할 때마다 양보를 하는 행태다. 양보의 이유가 배려심 때문이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나약함 때문이면 만만한 사람이 된다.
자신의 자유를 줄여서 마찰을 피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합리적인 결정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여 만들어진 공백은 무주공산 상태로 남게 되는데 나중에 이를 수복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그 사람의 정당한 권리인가를 객관적으로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을 찾기는 어렵다. 육각형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로 형성된 힘의 균형점이다. 따라서 공백 상태가 지속되다보면 주변 사람은 그 곳에 자신의 영향력을 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팔이 닿지 않는다면 막대기라도 구해오면 된다. 대표적인 막대기는 도덕적 우위와 그에 따르는 명분이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는 위선도 얼마든지 동원될 수 있다. 위선이 길어지다보면 내로남불이 부산물로 나오곤 한다.
편하기 위해 권리를 일부 포기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결코 편안해 질 수 없다. 내가 비운 공간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다른 사람의 영역으로 편입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쩍벌남의 경우는 지하철 의자에는 구획이 있으므로 누가 선을 넘었는지 판정이 가능하지만 추상적인 권리에 대한 침해는 객관적 기준이 없어 누가 누구의 권리를 침해했는지를 판정하기가 애매하다. 내가 그 공간을 되찾으려 하면 그것은 상대방이 정당하게 획득한 권리를 침범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상대의 권리의식이 충만해지면 윗 챕터에서 제시했던 요구를 직면하게 될 가능성은 점점 높아진다.
"칫솔 좀 빌려줘. 타인의 구강이 더럽다는 네 편견만 버리면 모두가 행복해져. 이를 닦지 않으면 나한테 입냄새가 나서 너도 괴롭고 나는 충치에 시달리게 될 거야. 끓는 물에 살균하면 오히려 혼자 그냥 쓸 때보다 깨끗할거야. 그리고 누구나 건강한 치아를 유지할 권리가 있어."
(글의 완성도를 위해 중요한 부분이 남음)
한편 자유는 타인으로부터 침해 당하지 않을 권리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할 권리로 나누어진다. 자유권의 영역은 권리의식의 영향을 받는데 일반적으로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권리의식이 어떤 것을 실현할 권리에 대한 권리의식에 비하여 강하다. 따라서 각 개인의 역량과 성격이 유사한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육각형은 타인으로부터 자유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의 영역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3-3) 자유를 위한 연대와 단결
앞선 쩍벌남의 예시와 같이 자유를 침해하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개인이 투쟁을 지속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내 칫솔을 쓰겠다고 덤비는 사람에게 칫솔을 순순히 넘겨줄 수는 없다. 어쩌다 보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요약본에 들어갈 내용으로는 다소 장황하지만 부조리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도 있어서 부득이하지만 굳이 써본다.
"너 혼자 쓰는 칫솔도 아닌데 한번 썼으면 끓는 물에 살균을 했었어야지 더러운 녀석아! 그리고 너 혼자 쓰더라도 살균을 하는게 네 건강에도 훨씬 좋다는건 모르냐? 칫솔살균기라는 물건이 괜히 있는 거겠어?"
=>"난 칫솔을 새로 사든지 소금으로 이 닦는 법을 배우든지 할테니 그건 이제부터 네가 써"(권리 포기)
"애초에 네가 새 칫솔을 나에게 줬다면 칫솔을 공유한다는 엽기적인 경험을 우리 둘 다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아쉽네"
=>"나 역시 애초에 단칼에 거절하든지 아니면 너에게 소금을 줘야했었다는 후회가 들더라. 내가 너에게 모질지 못해서 권리를 포기하면서 생긴 엽기적인 일이었어."
앞서 밝혔다시피 수 많은 쩍벌남들과 투쟁은 승리 가능성이 없지만 저항할 수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 쩍벌남들을 마주할 때마다 튼튼한 하체 힘으로 맞서 싸워주면 그들의 행동을 교정하는 효과가 생길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유를 침해하는 다수를 상대로 하는 투쟁은 특정 개인이 자기의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에 한정하여 (상투적인 생각으로 흐르는 듯 하여 좀 더 고민해볼 문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뜻이 맞는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여 투쟁할 필요가 있다.
다만 적정선을 넘는 단결은 파시즘으로 흘러갈 위험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4.법치주의
4-1) 군비경쟁과 죄수의 딜레마
편의를 위해 우산 비닐에 의인법을 사용하겠다. 애초에 사람을 비닐에 비유했으니 원래 뜻에 가깝게 환원한 셈이다.
비닐 입장에서 육각형을 벗어나 더 큰 영역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수압을 높여야 한다. 수압은 물의 무게로 결정된다. 따라서 비닐내부의 수위를 높이는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 모든 비닐이 끝단까지 물이 찰랑찰랑해 질 정도가 되면 수위를 높이는 경쟁은 끝나고 모든 비닐은 다시 육각형의 균형상태로 되돌아온다. 그러면 어떤 비닐이 물에 소금을 타기 시작한다. 소금물은 비중이 높기 때문에 소금을 많이 풀어넣은 쪽의 영역이 다시 넓어진다. 물에 소금을 푸는 경쟁은 포화상태가 되어 소금이 바닥에 가라앉을때까지 지속되고 우산꽂이는 다시 벌집구조를 회복한다.
그러다가 한쪽에서 소금물보다 비중이 높은 꿀을 넣고 어떤 쪽은 내용물이 반드시 물로 한정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영감을 받고 가격도 싸고 비중도 더 높은 사염화탄소를 사용한다. 공멸은 피해야 하므로 유독 물질은 쓰지 말자는 자성의 목소리도 일부 있었으나 이미 죄수의 딜레마는 작동해버렸다. 수압을 높이기 위한 경쟁은 지속되다가 결국 모두가 수은으로 각각의 비닐을 채우게 될 때 쯤 우산꽂이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버린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가 심화되다보면 사회를 붕괴시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상호 경쟁은 공정함만으로는 부족하고 공동체에 지나친 해악을 끼치지 않게 할 정도의 규율이 필요하다.
4-2) 법치주의
자신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플라톤의 국가론 도입부에 등장하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처럼 '정의는 강자의 이익'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약자의 권익을 말살하는 결과로 이어져 사회의 존속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공멸을 막기 위한 사회적 규약이 필요하다. 위의 우산 꽂이의 예를 든다면 부식성, 유독성 물질 사용금지, 물 외의 액체 사용 금지, 수위는 50센치 넘기지 않기 등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육각형은 상호 팽팽한 견제와 투쟁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도출된 균형점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방 권리를 편파적 법률과 제도 등으로 온전히 보전해주는 경우 그에 상반된 권리는 그 영역을 지키려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무력화된다. 예컨데 한 우산 비닐에 지름을 꽉 채우는 쇠파이프를 넣은 후 그 우산꽂이에 꽂는다고 가정해보자. 1미터도 안되는 수압으로는 철에 변형을 가할 수 없기 때문에 쇠파이프에 인접한 6개의 비닐 기둥들은 육각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찌그러질 수 밖에 없다. 압력은 찌그러진 6개 기둥 주변의 다른 벽면으로도 분산되어서 그 주변 기둥들의 육각형도 약간씩은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
쇠파이프는 경제적 지대가 되고 구성원들은 상대적인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쇠파이프를 구하는데 혈안(지대추구)이 되어 사회의 효율과 공정성은 크게 저해된다. 많은 비닐들이 쇠파이프를 포획한 경우 우산꽂이는 육각형 기둥의 벌집 구조 대신 원통으로 빽빽한 구조가 되는데 원통과 원통 틈바구니의 공백으로 인한 비효율이 발생하고 쇠파이프를 미처 확보하지 못한 비닐은 우산꽂이에 남아있을 수조차 없게 된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다른 비닐 입장에서 부러워 하지 않을 형태의 쇠파이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단면적의 넓이가 육각형의 면적을 초과하지 않는 굵기의 쇠파이프를 이용한다면 각각 비닐 입장에서 쇠파이프를 구하려고 노력할 이유가 크게 줄어든다.
5. 남겨진 문제 - 공리주의로의 회귀
법치는 공동체의 유지 존속을 위하여 필수적이지만 이는 필연적인 한계에 부딪친다. 어떤 원리에 의하여 입법을 하는가에 대한 문제다. 결국 칸트가 주장했던 보편적 입법원리라는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개인의 양심이나 정언명령의 차원이 아닌 각각 정당한 권리를 가진 당사자간의 충돌을 해결하는 문제에는 효용의 크기, 도덕적 지위, 이익 획득과 손실 회피 사이의 선호성 등 공리주의의 원리를 차용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해결 방안을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리주의는 그 자체에 해결하지 못한 모순점들이 산재해 있으므로 공리주의를 차용한 법치는 그러한 모순점들을 승계할 위험을 내재하게 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예컨대 더 많은 효용을 누리는 쪽의 편을 들더라도 그것이 승자 독식이 되도록 하지 않고 상대방의 양보에 대한 지분권도 일정부분 인정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생각을 더 이어나가는 것은 공리주의 논의로 빠져 원래 주제와 상관 없는 긴 내용이 이어지게 될 것이므로 이 글에서는 이하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공리주의에 대한 논쟁와 큰 차이가 있다. 기존 공리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격 없는 자들의 효용을 위하여 자격 있는 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지적이다. 그러나 이 논의에서 공리주의는 각각 자격 있는 사람 간의 분쟁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림이 많이 필요하고 쓰다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와서 일단은 여기까지... 모자란 점이 많아서 보완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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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하지는 않은데 통째로 지우기는 아까워서 분리해 놓음
3-4) 관용에 대하여
우리는 타인을 어느 정도까지 포용할 수 있을까?
관용은 한국어로는 너그러움이라는 뜻에 한정되지만 한영사전을 찾아보면 오히려 tolerance가 먼저 나온다. 이는 마음이 넓다는 뜻보다는 참아준다는 뜻에 가깝다. 내 영역을 침해하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를 참을 수 있을까.
양심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이다. 헌법재판소는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 판시했다.
컵과 칫솔
㈀ 너 컵 없구나. 내 컵이라도 써 -> 땡스
㈁ 더러우니까 내 컵 쓰지 마 -> 내가 더럽다고? 그러는 너는 얼마나 깨끗해?
㈂ 너 칫솔 없구나. 내 칫솔이라도 써 -> 뭐라고??(으엑 더러워)
㈃ 네 칫솔 써도 되니?
① 더러우니까 내 칫솔 쓰지 마 -> 내가 더럽다고? 그러는 너는 얼마나 깨끗해?
② 더러우니까 내 칫솔 쓰지 마 -> 이만하면 괜찮을것 같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③ 더러우니까 내 칫솔 쓰지 마 -> 그러네. 깨끗하게 좀 쓰지 그랬어
④ 더러우니까 내 칫솔 쓰지 마 -> 더러우면 넌 쓰지마. 난 쓸거야
⑤ 나야 좋지. 으흐흐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 빼고는 모두 둘 중 한명 이상은 정신 나간 상황들이라 쓰다보니 혼란스럽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종류의 뻔뻔한 요구에 직면할 수도 있다.
"칫솔 좀 빌려줘. 타인의 구강이 더럽다는 네 편견만 버리면 모두가 행복해져. 이를 닦지 않으면 나한테 입냄새가 나서 너도 괴롭고 나는 충치에 시달리게 될 거야. 끓는 물에 살균하면 오히려 혼자 그냥 쓸 때보다 깨끗할거야. 그리고 누구나 건강한 치아를 유지할 권리가 있어."
외투와 속옷, 가방과 운동화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지저분한 상상은 충분히 한 것 같고 굳이 반복해서 표현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우리에게 컵 뿐만 아니라 칫솔까지 요구하는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칫솔을 권하는 호의는 정상으로 볼 수 있을까.
컵을 빌려주지 않는 행위는 비판 받아야 할까.
허락 없이 선을 넘는 사람에 대한 포용은 가능한가.
이 챕터를 제대로 된 문장으로 정리하다보면 끝도 없이 장황해질 것 같아서 느껴져서 일단 미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