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가 곤란한 이유
서태지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
친구가 서태지는 매우 뛰어난 음악가라고 주장했다. 몇 번 들어 본 적 있는 그의 음악을 떠올려 보고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친구는 아직 내가 서태지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줬다. 정말 그럴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서태지의 솔로 데뷔 이후 음악을 기회가 되는 대로 구해서 들어봤다. 열심히 반복해서 들어봤는데 그 친구의 칭찬에 과장이 섞여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가사는 잘 들리지 않았는데 가사집을 구해서 보니 그룹으로 활동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중고딩 정신연령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내용이 상당부분 섞여 있었고 자폐스러운 가사도 몇가지 보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쪽팔려서 가사를 잘 안들리게 사운드 처리를 한 것 아닐까 라는 의문도 살짝 들었다. 물론 가사가 좋은 노래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가사는 그렇다 치고 곡도 다른 가수들에 비해 특별히 뛰어난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느낀 이유는 내가 그 장르 음악을 들을줄 몰라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앨범 전체를 듣다가 듣기 싫은 것을 선입견 없이 소거하다보면 남는것은 항상 타이틀곡이거나 미니앨범 수록곡, 좋은 평가를 받았던 곡이었다는 점에서 내가 음악의 좋고 나쁨을 구별하는 능력이 완전히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몇 달 전에 자본론 요약서를 읽었다. 요약서지만 4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이었다. 모두 읽은 후 얻은 결론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많다는 점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전에 글로 남긴 바가 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충분히 접해보고 익숙해 져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단점이 무엇인지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도 다 듣는 일이 드문데, 좋아하지 않는 가수를 비판하려고 모든 노래를 여러번 반복해서 듣는 것은 모순이다. 특정한 한명의 경제학자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400페이지나 되는 책을 읽어 준 적은 마르크스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대학교 1학년때는 궤변을 늘어놓는 선교자를 완전한 패닉에 몰아넣을 수 있는 카운터를 날리기 위해 그 지루한 구약성서를 읽었다.
시간이 많지 않거나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성격이라면 공정하게 비판하기 위해 굳이 과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도 없고 그냥 나는 그게 싫다고 여기는 것으로 족하다.
맞냐 틀리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가 현실에서는 훨씬 중요하다. 나에게는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의무나 모든 일에 공명정대해야 할 의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