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고(苦)의 하위개념?
108번뇌는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몸, 마음) 6가지 감각의 좋고 싫음에 의해 만들어진다.
6식은 곧 마음이다. 따라서 번뇌는 마음의 문제다.
한편 생즉고를 대표하는 "4고"라 일컫는 생로병사는 따지고 보면 의외로 마음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몸의 문제다.
늙거나 병에 걸리면 몸이 아프고 거동이 어려워진다. 몸이 아프면 정신까지도 병들기 쉬워진다. 인내심과 이타심이 약해지고 자존감이 떨어지고 생각도 비관적으로 흐르게 된다.
여러 날을 굶으면 몸에 힘이 없어져서 절은커녕 몸을 가눌수 없어 좌선조차도 어려워진다. 겨울에 변변한 옷과 집이 없으면 추위 때문에 병들기 쉬워진다. 몸의 고통은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할 경우에도 발생한다.
4고에 또다른 4고를 더하면 8고가 되는데 "8고"는 헤어지는 고통, 싫은사람 보는 고통,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 나의 존재에 집착하는 고통이 더해진 것이다. 생로병사 이외의 또다른 4고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 때문에 발생하는 번뇌이다.
따라서 고는 번뇌와 번뇌 이외의 것으로 나누어진다고 볼 수 있다.
번뇌의 원인인 욕심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해탈한 고승이 역모죄 누명을 쓰고 대명률에 따른 처벌을 받게 된다면 어떨까?
억울함이나 누명을 씌운 자를 미워하는 마음은 잘 추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몸에서 발생하는 고는 만만하지가 않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대명률에 따르면 능지를 할때는 눈꺼풀 근육을 가장 먼저 절개해서 눈을 우선 감겨야 한다. 그러나 가학적인 성격의 망나니는 고승에게 자기 신체가 절단되는 모습을 보는 고통까지 가하려고 악의적으로 눈꺼풀 자체를 잘라내서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손가락이 마디마다 잘려 나가고 손목과 팔꿈치가 잘리고 어깨가 뽑혀 버린다. 어깨까지 없어졌으니 심장이나 폐를 찔러서 곧 끝내겠구나 생각하며 모든 것은 공하다를 되뇌며 고통을 잊으려 안간힘 쓴다. 그러나 빨리 죽지 못하게 망나니가 지혈까지 하면서 발가락부터 다시 칼질을 시작해서 거세를 하고 코를 자른다. 감을 수 없게 만든 눈은 피냄새를 맡고 몰려온 동네 개들이 잘게 잘라진 그의 신체 기관들을 주워 먹는 장면을 끝까지 지켜보게 한 후 마지막에 뽑아낸다.
이런 상황이라면 육신의 고통은 너무 강렬하여 열반이 가까워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는 평온한 마음을 압도하지 않을까?
번뇌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으로 발하는 마음의 문제이고 고는 추가로 몸의 문제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다루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는 생각이 든다.
번뇌를 해결하는데는 돈이 들지 않으나 고를 해결할 때는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돈은 경합적인 자원이기 때문에 번뇌 이외의 고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간의 경쟁이 필연적이다. 따라서 고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그로 인해 새로운 번뇌가 발생할 여지가 크다.
예를 들어 희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큰 돈이 필요하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는 했는데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번뇌가 생긴다. 가만히 있었으면 몸만 아플텐데 해결해보겠다고 움직이니 마음까지 아파진 셈이다.
일단은 여기까지 쓴다.
모르니까 모르는 것으로 분류한다.
써놓고 읽어보니 이상한 부분이 많아서 좀 더 알아보고 생각해보고 고치는게 좋을듯하다.
-----------------------2024. 9월 추가 -----------------------------------------------
무식하니까 이런 글을 남겼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는 생로병사뿐만 아니라 3고 라는 개념도 있다.
3고란 고고, 행고, 괴고이고 각각의 내용은 이렇다.
고고(苦苦): 몸과 마음에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고통. 예) 육체적 고통, 슬픔, 괴로움
괴고(壞苦): 변화로 인해 즐거움이 사라지는 고통. 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건강 악화
행고(行苦):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미묘한 고통. 예) 삶의 무상함, 존재의 불안정성
해탈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는 고통은 주로 괴고와 행고에 대한 것이다. 간혹 고고도 포함되는데 그 중에서는 정신적 고통이다. 육체적 고통은 애초에 해탈의 대상이 아니었다.
무식해서 쓸데없이 엉뚱한걸 붙잡고 늘어진 글이 되어버린 셈이다.
좀 더 풀어보자면 해탈은 육체적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
위에서 예시로 든 해탈한 고승은 능지형을 당할 때 엄청난 육체적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형벌을 선고받고나서 집행 전까지 느낄 엄청난 공포감으로부터 자유롭다.
악형을 선고한 판관에 대한 원망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집행 중일 때 형리를 원망하는 마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곧이어 맞이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자유롭다.
병의 경우도 고고와 괴고가 분리된다.
병이 걸리면 몸이 아픈건 고고다.
병 때문에 쇠약해지면 어쩔까,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닐까라는 식의 걱정을 한다면 괴고다.
번뇌 중에서 두가지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남겨본다.
생과 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는 이성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다.
생 즉 태어남을 고통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고통으로 가득한 삶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어남 자체는 고통으로 볼 이유가 없다. 태어나고 나서 일어나는 일이 고통이다.
태어남을 고통이라고 보는 것은 고통의 중복 계산이라는 논리적인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독성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복어 요리를 먹었다고 치자. 복어의 독이 퍼지면서 고통을 느끼면서 죽게 될 것이다. 고통은 독이 퍼질 때 나타난 것이지 복어 고기를 맛있게 씹어서 삼킬 때 나타난 것이 아니다.
태어남 자체를 고통으로 지정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고통의 종류와 양을 늘린다는 문제가 있다.
1. 복어를 맛있게 먹은 고통(?) 2. 복어 독에 중독되어 겪는 고통
1을 고통으로 보아 고통의 종류가 2가지였다고 계산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는다.
한편 태어나면서 삶이 시작되는데 삶은 원래 고통이니까 태어남과 동시에 고통의 시작이라는 식의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의 문제점은 고통을 사람이 실제로 느끼는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으로 치환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대상을 있는대로 봐야 하는 정견에 어긋나는 태도이다.
사(죽음)의 문제는 에피쿠로스 학파에게 의탁하면 된다.
죽음이 고통인지 아닌지는 미지의 영역이기는 하다. 하지만 죽는 순간 감각기관이 정지되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리고 윤회에 대해 걱정할 수 있지만 내세에 나를 이어갈 어떤 존재는 나와 동일성을 이어가는 아트만이 아니다. 그는 색수상인식 오온이 연기에 의해 변화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진 나와 동일성이 없는 개체다. 따라서 현생의 내가 윤회 이후 내세의 나를 걱정할 필요는 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