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것

번뇌에 대한 오해?

누미 2015. 3. 8. 09:27

부처는 번뇌의 원인을 욕심, 성냄,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욕심, 성냄, 어리석음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은 듯 하다.

욕심도 없고, 성내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지만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내 번뇌의 원인으로 될 때도 있다.

타인의 욕심, 성냄, 어리석음 때문에 발생한 고통을 이기기 위해 나의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건 가렵다고 남의 다리를 긁거나 신발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 일수도 있다.

한편 나의 욕심, 나의 성냄, 나의 어리석음이 나의 번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번뇌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고통은 실체가 없고 허망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불성을 찾아 극복해야 한다는 말도 듣기에 좋기는 한데, 고통 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실체가 없고 허망한 존재라는 점은 간과한 듯 하다.

흘린 밥알 한톨은 주워 먹거나 버리거나 내 몸에 미치는 영향은 없는거나 다름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버려진 밥알 한톨은 지나가는 벌레 한마리에게는 오랫동안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식량이 된다.

고통은 흘린 밥알 같이 허망하고 의미 없는 존재라 0으로 수렴하지만 마찬가지로 나도 0으로 수렴하므로, 분모(나 자신)와 분자(고통)가 정수(integer) 분의 정수 형태로 약분 되어 실체가 있는 숫자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카르마와 내세는 불교의 고유한 특징이라기보다는 부처가 살았던 시대를 지배했던 힌두교의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런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불교를 귀족 중심적이고, 현실의 문제에 눈감게 하고, 이론적으로 난해하게 만들기보다는 지금 당장 자기와 다른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마음 수양 및 실천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다. 불교의 수행법인 팔정도의 첫번째는 정견인데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답을 미리 정해놓고 끼워 맞추는 식으로 보려고 하면 있는 그대로를 올바르게 볼 수 없다.


나의 자비는 다른 사람의 번뇌를 덜어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자비 역시 내 번뇌를 덜어줄 수 있다.

중생 구제라는 건 업장 두터우면서 별다른 수행도 안하는 사람을 부처의 권능으로 모든 업장을 소멸시켜서 해탈 시켜주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이 현재 시달리고 있는 번뇌를 없애주는 거라 생각한다. 뿌린 대로 거두는 불교 이론에 비춰봤을 때 부처 눈에 띄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격 없는 사람이 공짜로 성불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먹이고 슬퍼하는 사람에겐 슬픔의 원인을 제거해 주거나 위로를 하는 게 중생 구제라고 본다.


번뇌가 없어지면 마음을 수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성불하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해진다. 대자대비는 고통받던 중생이 해탈에 이르는 첫걸음을 시작할 수 있게 돕는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결론이 대자대비로 중생 구제인 건지 모르겠다.


지장보살이 중생 구제한다고 지옥에 갈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옥의 행정을 총괄하는 두목 악마가 지장보살을 영접하고 사면자 명단을 받은 후 명단에 기재된 중생들을 놓아주는 식으로 중생 구제가 일어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지옥이란 중생이 저지른 악업에 의해 스스로 빠져들게 된 곳이다. 지장보살은 해탈한 존재라서 서 있는 자리가 곧 불국토이고 중생 만나러 불지옥에 가더라도 그 자신은 지옥의 불길이 닿지 않는다. 지장보살은 스스로 빠져든 지옥에서 고생하는 중생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떨쳐낼 수 있게 지혜와 자비를 배풀어서 스스로 그 곳에서 빠져나오게 돕는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교리에 합당한 해석일 것이다.